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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사단’은 억울하다?

등록 2006-04-06 00:00 수정 2020-05-03 04:24

김재록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만한 뚜렷한 끈 없는데도 또 구설… 두 정권 거치면서 남겨놓은 발자취가 워낙 깊고 넓은 탓 뿐일까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사단? 아예 ‘군단’이라고 하지.”

‘김재록씨 로비 의혹’ 사건으로 또다시 구설에 오른 ‘이헌재 사단’의 한 인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재록씨와 이헌재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연결시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설명이다. 이헌재 사단이란 용어에 대한 불쾌감도 묻어났다. “(이 전 부총리가) 무슨 암흑가 보스인가?”

“이헌재가 무슨 암흑가 보스인가”

그는 “이번 기회에 정말 철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그분’(이헌재)한테서 감화를 받아 뜻을 이어받으려는 이들과 그분 이름을 팔고 다니는 사람들이 구분됐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부정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이헌재 사단’과 ‘이헌재의 사람들’은 다르다는 뜻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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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사의 반박성 해명이 아니더라도 김재록씨 로비 의혹과 이 전 부총리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만한 뚜렷한 끈은 아직 없다. 김씨가 외환위기 직후 기업·금융 부문의 갖가지 인수·합병(M&A) 작업에 깊이 관여했고,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으로 기업·금융 구조조정을 총지휘한 사람이 이 전 부총리라는 점에서 어떤 식으로든 얽혀 있을 것이란 추측만 있을 뿐이다. 여러 가지 정황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이 역시 불투명한 정보에 바탕을 둔 경우가 많다. 김재록씨의 이력조차 고등학교 이후론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단적인 예다.

이처럼 김씨와 이 전 부총리의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드러나지 않았는데도 일찌감치 ‘이헌재 사단’에 의혹이 쏠려 있는 걸 어떻게 봐야 할까? 언론의 섣부른 추측에서 비롯된 선정적인 오보일까? 금융권에 넓게 포진해 있는 ‘이헌재의 사람들’ 때문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구설일까?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이헌재 전 부총리를 빼고 관료 출신으로 이름 석자 뒤에 ‘사단’ 꼬리를 달고 다니는 사람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헌재 사단으로 일컬어지는 당사자들은 사단의 실체를 부정하지만, 금융권 안팎에선 이헌재 사단이란 용어가 이미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이헌재 전 부총리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은 이들이 금융권 곳곳에 두루 걸쳐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금융권 안팎에서 ‘이헌재의 사람들’로 꼽히는 이들로는 국민은행 부행장을 지낸 이성규 코레이 최고지식책임자(CKO), 서근우 하나은행 부행장을 우선 들 수 있다. 외환은행 인수 작업을 주도하고 있는 김기홍 국민은행 수석부행장(전 금감원 부원장보), 국민은행 감사를 거쳐 2004년 4월부터 금융통화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성남 전 금감원 검사총괄실장, 정기홍 서울보증보험 사장(전 금감원 부원장), 김영재 칸서스자산운용 회장(전 금감위 대변인), 오호수 전 증권업협회장, 박해춘 LG카드 사장, 황영기 우리은행장도 흔히 이헌재 인맥으로 분류된다. 이 밖에 김석동 재경부 차관보, 전홍열 금감원 부원장 등 관료 사회에도 이헌재 사단으로 일컬어지는 이들이 포진하고 있다.

이건희 삼성 회장도 눌렸던 위세

인맥 구성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헌재 사단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부터다. 재무부 관료 출신으로 오랜 야인 생활을 거친 이 전 부총리가 초대 금융감독위원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해였다. 당시 금감위원장은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기업·금융 구조조정을 총괄하는 임무를 맡아 막강한 힘을 지녔다. 은행감독원,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을 합친 금융감독원장을 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을 비롯해 내로라하는 재벌 회장들도 이헌재 위원장의 위세에 눌리던 시절이었다. 이헌재라는 이름 뒤에 ‘금융 황제’라는 말이 덧붙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이때 그와 같이 일한 각계 전문가 그룹과 관료들에게도 힘이 강하게 실릴 수밖에 없었고 ‘사단’이란 용어를 낳기에 이르렀다.

이 전 부총리는 ‘국민의 정부’ 시절 초대 금감위원장(1998년 3월~2000년 1월)에 이어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재경부 장관(2000년 1~8월)을 역임한 데 이어 ‘참여정부’ 들어 다시 경제부총리(2004년 2월~2005년 3월)로 영입된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 정책의 밑그림을 그린 주역일 뿐 아니라 두 정부에 걸쳐 경제 정책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셈이다. 이같은 화려한 경력에 그의 독특한 인간적 ‘매력’이 결합되면서 광범위한 인맥을 형성했다. 이 전 부총리는 ‘경기고가 낳은 3대 천재’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출중한 능력을 자랑하면서도 모범생 이미지와는 딴판이다. 신뢰하는 부하들한테는 편하게 반말을 씀으로써 무장해제시키는 면모를 보인다. 술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만나기를 즐길 뿐 아니라 광범위한 독서량과 폭넓은 사회 경험에 힘입어 좌중의 화제를 주도한다. 말은 어눌한 듯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화술은 인간적 매력과 카리스마를 한층 높이는 요인이다. 이 때문에 그와 한번 인연을 맺은 이들은 강한 매력을 느끼고 쉽게 이끌린다고 술회한다. 업무로 관계를 맺은 이들뿐 아니라 당시 금감위를 출입한 기자들 중에도 이 전 부총리의 매력에 끌린 이들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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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사단으로 통칭되는 이들은 스펙트럼이 넓어 한마디로 꼬집어 ‘이러저러한 사람들’이라고 특징지을 만한 점을 찾기 어렵다. 사단에서 풍겨나는 통일된 이미지를 발견하기 어렵다. ‘이헌재’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자전거 바퀴살처럼 각각 연결돼 있는 모래알 조직 같다는 느낌을 준다. 사단에 들어 있는 사람들 사이에 일면식도 없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경제 철학이나 정책 기조를 공유하는 것도 아니다. 이 전 부총리와 인연을 맺은 계기도 제각각 다양하다.

이름을 팔고 다닌 이들이 많았겠지만…

예컨대 이성규 CKO나 서근우 부행장은 1980년대 한국신용평가에서 일할 때 일찌감치 이 전 부총리와 인연을 맺었다. 이 전 부총리는 재무부를 떠난 뒤 1985년 한신평을 차려 초대 사장으로 일한 바 있다. ‘조용한 학자풍’의 두 사람은 이헌재 위원장의 금감위 시절 각각 기업구조조정위원회 사무국장, 금감위 구조개혁단 제2심의관으로 기업 구조조정 실무를 이끌었다. 김기홍 부행장이나 이성남 위원은 금감위 출범에 즈음해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인정받아 발탁됐다. 정기홍 사장, 김석동 차관보, 김영재 회장은 금감위라는 공적인 공간에서 업무 능력으로 이 전 부총리의 신뢰를 얻었다는 평이다. 이 밖에 금융감독 정책의 대상인 업계 쪽에도 자칭 타칭 이헌재 사단으로 분류되는 이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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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사단’의 범위가 이처럼 워낙 넓어 그의 이름을 팔고 다닌 이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 금융권 요직에서 밀려난 이들이 이헌재 쪽 사람들을 깎아내리기 위해 구설을 지어낸다는 푸념도 들린다. 이런 점에서 의혹 사건 때마다 도마에 오르는 게 이 전 부총리 쪽에선 억울할 수도 있다. 청와대를 사칭하는 사기꾼의 행태까지 청와대가 책임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이 전 부총리가 두 정권을 거치면서 남겨놓은 발자취가 워낙 깊고 넓어 기업·금융 구조조정과 관련된 의혹 사건에서 구설은 운명처럼 피하기 어려운 듯하다. 더욱이 론스타에 대한 외환은행 헐값 매각(2003년) 의혹에 김재록씨가 연관됐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어 이헌재 사단으로 여겨지는 당시 금융정책 책임자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김재록씨 의혹 사건을 섣불리 이 전 부총리로 연결짓거나 이헌재 사단을 한 묶음으로 매도하는 건은 경계돼야겠지만, 이헌재 사단을 둘러싼 구설이 영웅의 몰락을 바라는 대중의 악취미라고만 할 수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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