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5년 동안…참…

등록 2006-03-31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복직된 GM대우차 부평공장 해고노동자들의 파괴된 삶과 새로운 희망… 대부분 재취업하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려, 가정파괴까지 겪은 사람들도
</font>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동지들의 복직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랜 세월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3월23일 오후, 인천에 있는 GM대우차 부평공장. 대우자동차노동조합과 ‘정리해고 원상회복 투쟁동지회’가 내붙인 현수막이 드넓은 공장 곳곳에 걸려 있었다.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 몇몇이 조립라인 공장 앞뜰에 삼삼오오 모여 봄 햇살 아래서 담배를 피워물고 있었다.

지난해 순이익 내며 해고자 전원 복직

정아무개(35)씨는 품질검사 공장 한쪽에 마련된 강당에서 ‘신규’ 직무교육을 받고 있다. 3월20일자로 부평공장에 복직한 286명 중 한 명이다. 복직자들은 1주일간 교육을 받고 생산라인에 다시 배치된다. “5년 전 이맘때 공장을 점거하고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벌였죠. 나도 투쟁에 참가했고. 얼마 안 있어 집으로 봉투가 날아왔어요. 해고 통보였습니다. 당시 결혼 날짜까지 잡아놓았었는데….

[%%IMAGE1%%]

정리해고된 저를 끝까지 믿고 일정대로 결혼해준 아내와 장인 장모한테 고맙죠.” 정씨는 2001년 2월 부평공장에서 정리해고된 1725명 중 한 명이다. 공장에서 거의 막내였다.

정씨는 학교를 졸업하고 1995년 곧바로 대우차에 입사했다. 2001년 당시 조립1부 ‘라노스’ 생산라인에서 일하고 있었다. 공장을 떠난 해고 노동자로 산 5년은 여느 노동자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여기 부평은 원래 연고도 없었고, 해고된 뒤 조금 있으니까 돈도 떨어지고 집주인도 집을 비워달라고 해서 아내가 살아왔던 청주로 내려갔어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했죠.” 같이 해고된 나이든 고참 노동자들에 비해 그래도 젊으니까 직장을 쉽게 잡을 수 있다고 믿었을까? “직장 구하는 거 만만치 않았어요. 막노동도 하고 음료수 배달도 하고 청소환경 일도 하고….” 한 달 수입 80만원에 불과한 이런저런 일을 전전하다 3년 전부터 식자재 납품하는 곳에 취업했다. 정씨는 5살과 3살짜리 자녀 둘을 두고 있다.

“나도 언젠가는 복직될 거라고 믿고 있었죠.” 2002년 12월부터 순차적으로 정리해고자들이 수백 명씩 공장에 복직했고, 정씨도 인천에 오면 옛날 동료들과 술 한잔 하거나 노동조합에 수시로 들르면서 복직 순서를 기다려왔다. “직무교육장에서 옛날 동료들을 만나보니 사업 실패도 많이 하고, 사기도 많이 당하고, 신용불량자 된 사람도 많더라고요. 다들 힘들게 살았던 것 같아요. 아무튼 그때 얼굴들을 다시 만나니까 기분 좋죠.” 그는 10년 된 라노스 차를 타고 다닌다. 자기가 생산라인에서 조립했던 차종이다.

[%%IMAGE2%%]

5년 전 대우자동차 노동자 1725명은 집배원이 전해준 ‘근로계약 해지 통보서’를 받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분노가 뒤엉키는 절망감 속에서 출근투쟁을 벌이다가 결국 공장을 뒤로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2002년 말부터 지난 3월20일까지 순차적으로 1367명이 복직했다. 회사와 노동조합이 “회사가 정상화되면 해고된 직원들을 우선적으로 다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한 데 따른 것이다. GM대우가 2002년 대우차를 인수할 당시 군산·창원 공장만 인수하고 부평공장은 대우인천자동차(주)로 분리된 채 공장이 계속 돌아갔다. GM대우는 지난해 10월 부평공장을 다시 흡수합병했고, 신설법인 출범 3년 만인 지난해 처음으로 647억원의 순이익을 내 흑자로 돌아서면서 이제 정리해고자 전원 복직이 이뤄지게 됐다.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이 뭘 하겠습니까

이미 복직한 1367명을 빼고 나머지 360여 명 가운데 280여 명은 오는 5월 말 한꺼번에 재입사할 예정이다. 이들은 공장에 복귀하겠다고 이미 의사를 밝힌 상태다. 문제는 연락이 끊긴 80명이다. 80명을 수소문하기 위해 회사 쪽과 노조는 경찰의 도움을 얻어 주민등록번호로 주소를 확인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대우차노동조합 김성열(45) 실장은 “최후의 한 명까지, 몰라서 복직하지 않는 사람은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1725명 중에서 공장에 복직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사람은 얼마나 될까? 회사와 노조는 “복직하지 않겠다는 사람은 1725명 중 10명도 채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리해고된 뒤 다른 조립완성차 공장에 재취업한 사람은 현대자동차에 들어간 단 한 명뿐인 것으로 알려진다. 우체국 집배원으로 새 직장을 잡은 사람도 한 명 있다. 복직을 원치 않는 정리해고자에 이 두 사람이 포함된다. 이처럼 거의 모든 정리해고자가 5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공장에 다시 들어와 일하겠다고 한 것은, 지난 5년간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해 재취업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만약 부평공장보다 더 나은 직장을 구했다면, 다른 이유가 없는 한 힘든 조립라인 공장 생활에 복직하겠다고 나설 리가 없기 때문이다.

대우차노조 김성열 실장은 25살이던 1986년 부평공장에 들어와 청춘을 다 보내고 2001년 정리해고될 때 40살이었다. “공장 안에서만 일하던 노동자들이 바깥에 나가서 대체 뭘 하겠습니까? 돈도 없고 경험도 없고, 자동차 부품업체고 뭐고 나이 많다고 취업도 안 되고…. 멋모르고 사업에 덤볐다가 실패하고,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일용직으로 전전했어요.” 상당수 정리해고 노동자들이 예전의 인맥을 활용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대우차동차 판매영업이었다. 김 실장도 잠깐 자동차 판매 일을 하다가 2003년 공장에 복직했다. 86년에 입사했으니 원래 사번은 ‘86xxxx’인데 ‘03xxxx’로 바뀌었다. 그러나 오는 8월부터는 해고기간의 호봉까지 모두 회사가 인정해주기로 했기 때문에 사번이 다시 ‘86’으로 돌아가게 된다.

[%%IMAGE3%%]

대규모 정리해고는 수많은 개인과 가족에게 파괴적인 후유증을 남긴다. 처음에는 회사와 동료에 대한 분노로, 다음에는 사회에 대한 적개심으로, 마지막에는 자신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면서 해고의 아픔은 깊어지고 자기 파괴적이 된다. 부평공장 해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해고된 뒤 벌어놓은 돈을 다 까먹고 나자 부인이 돈벌이를 위해 보도방에 나가다가 남편이 이 사실을 알게 돼 가정이 깨진 경우도 있다고 한다. 대우차 노동자의 평균나이는 43살, 평균 근속연수 18년이다. 김 실장은 “나이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재취업이 안 되는 것도 있지만 정리해고된 노동자로 낙인찍히면 능력이 없거나 뭔가 안 좋은 것 아니냐는 시선으로 보기 때문에 더욱 새 일자리를 잡을 수 없다”고 말했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 좋다

공장을 나간 뒤 사업 좀 해보다가 다 말아먹고 비정규직으로 다시 부평공장에 취업한 노동자도 10여 명이나 된다. 모두들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2002년 말 이후 대규모 복직이 있을 때마다 면접을 거쳐 가정형편·근속연수 등을 따져 우선적으로 재입사할 사람을 선별했는데, 최대한 불쌍하게 보여 재입사 대상에 포함되려고 노숙자처럼 남루한 차림으로 면접장에 나타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정리해고자 7∼8명이 세상을 떠났는데 정리해고 이후 공사판에서 막일을 하다 죽은 사람도 있어 동료들을 안타깝게 했다. 해고기간에 정년퇴직 나이가 돼버려 재입사를 못한 경우도 있다. 아무튼 5년간의 기나긴 불완전취업 또는 실업 속에서 더 버티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때에 이뤄진 복직이라 재입사자들의 감회는 더욱 깊다.

엔진구동 생산공장에서 만난 윤필원(45)씨는 직무교육을 마치고 실습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도 1725명의 정리해고자 중 한 명이다. 윙윙 시끄럽게 공장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예전엔 잘 몰랐는데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5년 공백이 있어서 그런지 처음에는 공장 소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이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좋아요.” 군대 마치고 1986년 입사해 15년을 보낸 공장이다. 단군 이래 한국 경제 최대 호황 시절이었던 1986년에 대우차는 월드카 ‘르망’ 생산에 나서면서 주야 2교대로 공장을 풀가동했고, 서류만 내면 누구나 입사했을 정도로 ‘좋았던 시절’이었다. 실습교육이지만 윤씨는 86년 첫 입사 때처럼 수습기간이나 다름없다.

그는 부평을 떠나지 않았다. 해고된 뒤 실업수당을 받고 자동차 영업소에서 일하면서 일곱 달쯤은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실업의 고통은 곧 닥쳐왔다. “바깥에 나가 일을 해보려고 달려들었지만 되는 일도 없고, 아이들은 점점 더 커가고… 힘들었죠. 영업이라는 영업은 다 해봤는데, 하도 돈벌이가 안 돼 작년 5월부터 인력사무실에 나가 노가다를 뛰었어요.” 고향 선배가 뒤를 도와준다기에 생전 처음 해보는 금융 관련 일에 나섰다가 빚만 늘기도 했다. “처음에 눈으로 보이는 건 많은데, 실제로 해보면 남는 건 빚밖에 없어요.” 아내가 생활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면서 버는 한 달 50만∼60만원으로 먹고살아야 했다. 한때 아들 고등학교 입학금이 없어서 못 낸 적도 있다고 한다. “여기 공장에 붙어 있던 때보다 좋아졌다는 사람 한 명도 없어요. 다들 인력시장에 나가고, 이혼한 사람도 많고…. 공장에서만 일하다 사회에 나가면 한 달도 못 가 다 말아먹고 말아요. 어렵사리 다른 곳에 취업했다가도 대우차에서 정리해고됐다는 사실이 드러나 쫓겨난 사람도 있어요.”

아이들을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공장에 돌아왔지만 아내는 계속 할인매장에 나갈 생각이다. “해고의 아픔을 겪어봤는데 언제 또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버지 복직을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겠네요”라는 질문에 윤씨는 울컥 목이 메는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작업복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한 대 피워물었다. 감정을 추스른 뒤 다시 말문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이미 잠겨 있었다. “중학생 딸이 엊그제 ‘이제 엄마 일하러 안 나가도 되겠네’ 하더라고요. 먹고사는 거야 없이 살아도 어떻게 참아본다지만, 아이들이 한창 클 때 아버지가 집에 놀고 있는 게 가장 상처가 커요. 그게 가슴에 맺히죠.” 하지만 윤씨를 비롯해 부평공장 앞뜰에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워물고 있는 복직자들은 지난 5년간 뭘 하고 살았는지 서로 안부를 묻다가도 “공장이 잘 돌아가 주야로 풀가동되면 1년에 5천만원도 벌 수 있다”고 서로 격려하고 있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