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기업 이오넥스가 CDMA 모뎀칩 탑재한 휴대전화기 개발하고도 쉬쉬 하는 사연…15년 동안 기술 독점해온 퀄컴의 눈 밖에 났다간 휴대전화기를 아예 못 만들수도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벤처 회사인 이오넥스(대표 전성환)가 국내 처음으로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모뎀 칩을 탑재한 휴대전화기를 개발했다는 소식 뒤 몇몇 의아스러운 일을 겪었다.
목소리를 전기 신호로 변조하고, 이를 다시 목소리로 복조하는 기능의 모뎀은 휴대전화 단말기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핵심 부품인데, CDMA 모뎀 칩은 미국 퀄컴이 독점 공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오넥스의 성과는 상당히 큰 의미가 있다. 이오넥스 쪽이 10월24일 오전 기자들에게 이메일로 배포한 자료에 이런 점이 잘 부각돼 있다.
이동전화 시장의 먹이사슬 관계
‘CDMA 휴대폰의 성공적 출시는 지난 15년 동안 퀄컴이 지배해온 세계 CDMA 휴대폰 모뎀 시장 구도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며, CDMA 모뎀 수입에 지불되는 막대한 외화 지출(한 해 3조원가량)을 줄이는 출발점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발표 당일 오후부터 이오넥스 쪽에서는 곤혹스런 분위기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이오넥스는 기자들에게 이메일을 다시 보내 애초 발표문에 담겨 있던 ‘LG전자’를 빼줄 것을 요청했다. 애초 자료에서 ‘이번 휴대전화기 개발은 LG전자가 SK텔레콤용으로 출시한 것’으로 설명돼 있었다. 이오넥스나 LG전자로선 자랑 삼아 바깥으로 알릴 일인 듯한데, 도리어 숨기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의기양양하게 발표한 지 반나절 만에 뒤바뀐, 납득하기 어려운 태도였다.
기술 개발 과정의 뒷얘기를 들어볼 요량으로 전성환 사장과 어렵사리 전화 통화를 한 뒤 의아스러움은 더 커졌다. “회의 때문에 바빠서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야 도리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앞뒤 맥락에 대한 설명 없이 ‘안 쓰는 게 도와주는 거다’라거나 ‘우리도 먹고살아야 하니 이해해달라’며 전화를 끊은 것은 황당함을 넘어 호기심을 한층 더 불러일으켰다. 상당한 의미를 띠는 기술을 개발해 대대적으로 발표했다가 이를 다시 주워담으려는 모습을 어떻게 봐야 할까?
휴대전화 단말기 제조업체 관계자는 “휴대전화 모뎀 칩 개발에선 퀄컴이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며 “(이오넥스의 칩 개발 발표는) 하룻강아지가 범을 건드린 형국”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자신의 실명은 물론이고 회사 이름도 거론하지 말아달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퀄컴과 우리는 갑과 을의 관계다. 퀄컴이 모뎀 칩 공급량을 줄이면 휴대전화를 내다팔 수 없게 된다. 디자인과 성능이 아무리 좋아도 퀄컴의 칩이 없으면 휴대전화를 아예 만들 수 없는 실정이다.” 결국 이오넥스에서 벌어진 해프닝은 퀄컴을 꼭대기에 둔 ‘이동전화 시장의 먹이사슬’ 관계에서 비롯됐다는 설명으로 들린다.
휴대전화 단말기 업체는 퀄컴의 눈치를 봐야 하고, 이오넥스는 (납품처인) 휴대전화 단말기 업체에 목을 매고 있다는 권력 구도를 감안할 때 충분히 그럴 만해 보인다. 이오넥스-LG전자-SK텔레콤이 손잡고 CDMA 모뎀 칩을 개발한 것으로 비쳐지면, 퀄컴 쪽에서 LG전자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기술 진화할수록 퀄컴 지위도 위협받을 것
이오넥스의 CDMA 모뎀 칩이 기술적으로 비교적 후한 평가를 받으면서도 시장성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건 이런 맥락으로 풀이된다. 이오넥스로선 삼성전자나 LG전자 같은 휴대전화 단말기 업체들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는 규모여서 국내 업체들이 아직은 퀄컴에 종속당하는 걸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기술 수준은 물론이고 가격 측면에서도 이오넥스가 우위를 지녔다는 보장도 없다고 하니….
국내 이동통신 단말기 업계에선 현재 3세대에 와 있는 단말기 시장이 3.5세대를 넘어 4세대로 가면서 퀄컴의 그늘에서 벗어날 길이 열릴 것이란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있다. 전파만 송수신하는 1세대, 문자를 비롯한 데이터까지 주고받을 수 있는 2세대에서 나아가 화상 통화까지 가능케 한 3세대를 넘어 진화를 거듭할수록 퀄컴의 독점적 지위도 위협받는 ‘블루오션’으로 들어서게 될 것이란 점에서다. 그때까진 퀄컴의 눈치를 보며 숨죽이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의 현실이라고 업계 관계자는 전했다. 한발 앞선 독점적 기술의 위력을 새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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