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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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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환율체제를 만들라

등록 2005-03-23 00:00 수정 2020-05-03 04:24

미 경제 불안정과 달러화 약세가 위기 부를 수도…상이한 환율정책 극복하고 긴밀한 협조체제 이뤄야

▣ 전창환/ 한신대 교수·국제경제학

최근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가 한껏 고조되고 있지만 우리 경제를 둘러싼 대외적 여건은 의외로 아주 불안해 보인다. 유가의 지속적 상승 추세도 문제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달러화 가치의 급격한 하락 조짐과 원화 가치의 급상승이다. 지난해 말부터 중국, 러시아 등 일부 달러표시 외환 보유 국가들이 달러화 가치의 추가적 하락 예상에 따라 보유 자산을 다변화할 것을 시사하자, 달러화 가치의 하락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2005년 2월 한국은행도 이와 유사한 정책 기조를 공표하자마자, 원화 가치가 다시 급격한 상승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부시가 불균형 해결할 가능성 없어

최근 환율 불안을 위시한 미국과 동아시아 경제의 불안은 미국 경제의 구조적 불균형(가계·재정·무역적자 등 미국의 3대 적자), 그리고 미국과 한, 중, 일, 대만 등 대미 채권국가들간의 경제적 관계에서 기인한다. 특히 최근 미국 경제의 대내외적 불균형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경고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우선 대내적으로는 가계부채가 크게 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계의 저축률이 원래부터 낮았던데다 90년대 극단적인 저금리하에서 주택 구입을 위한 주택저당차입이 붐을 이루면서 가계 부채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둘째, 부시 정부의 감세와 군비지출 증대로 재정적자가 2년 연속 과거 최대치를 경신해 2004 회계연도 연방재정적자가 4123억달러에 달했다. 끝으로 대외적 불균형을 보면 2002년 초부터 부시 정부가 완만한 약한 달러 정책을 유지해왔음에도 미국의 무역적자는 계속 눈덩이처럼 불어나 2004년에는 무려 6515억달러에 달했다.

미국은 이런 대내외적 불균형을 자본유입(해외의 공적 부문과 민간부문에 의한 미국의 주식, 국공채에 대한 포트폴리오 투자)으로 대처해왔다. 미국이 세계 최대의 채무국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일례로 해외부문이 보유하고 있는 미국채의 투자 잔액이 2004년 말 1조9360억달러에 달하고 있으며, 그 중 반 이상을 한, 중, 일, 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보유하고 있다. 2005년 초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2천억달러에 이르고 있는 것도 이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미국의 대내외적 불균형을 해소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즉, 미국이 민간저축률을 높이고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를 줄이면 된다. 하지만 부시 정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성장률 둔화와 금융 불안 등 많은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첫째, 가계부채를 줄이는 정책을 단행할 경우 기존의 저금리 기조와 주택저당 대부제도에 의해 형성돼온 주택구입 붐과 주택가격 거품이 송두리째 깨질 수 있다. 둘째, 부시 정부가 고소득층을 겨냥한 감세,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미명하에 추진해온 군비지출 증대를 포기할 가능성은 집권 2기 부시 정부의 존립 기반을 뒤흔드는 것이기 때문에 좀처럼 생각하기 어렵다. 오히려 미국의 정책당국은 재정적자와 직접적 관계가 없는 사회보장제도를 대폭 손질해 민영화하려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조건에서 미국 정부가 마지막으로 기대는 것이 동아시아 국가들의 대미 증권투자를 통한 흑자 자금의 대미 환류와 동아시아 통화의 절상 압력이다.

사실 2004년 하반기까지만 하더라도 한, 중, 일, 대만 등 주요 동아시아 흑자국가들은 대외수출 경쟁력 유지와 성장세의 회복이라는 절박한 상황에서 달러 약세·자국통화의 절상 압력을 차단하기 위해 끊임없이 외환시장에 개입해왔다. 개입의 결과는 천문학적 숫자의 외환보유액과 달러표시자산의 누적이다. 겉으로는 외환보유액이 풍부해져 1997년의 외환위기와 같은 유동성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크게 강화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과도한 외환시장 개입과 달러표시 자산의 축적이 심각한 경제적 부담과 위험을 초래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경우 외국환평형기금채권 보유한도의 확대와 소진 등으로 재정부담이 더 커질 뿐 아니라 달러약세로 인해 환차손 등을 입을 위험성이 높다. 내수부진과 경기침체하에서 원화절상 압력은 2005년 한국 경제의 회복을 가로막는 최대 걸림돌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협조의 경험, 너무 일천한 상황

설상가상으로 2005년 초 미국 재정적자에 대한 전망이 더 악화되자, 달러화 약세 경향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환차손을 우려한 주요 대미 채권국가들이 달러표시 자산 일변도로 형성돼 있던 기존의 외환보유액 구성을 다변화할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외환보유액 중 달러표시 자산의 비중을 줄이는 대신 비교적 안정적인 강세를 보이고 있는 유로화의 비중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외화표시 자산 구성의 다변화가 사전에 충분한 합의하에 질서 있게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달러화의 약세 차원을 넘어 ‘달러화의 폭락=달러이탈’ 현상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미국에 유입되어 미국의 세 가지 적자를 보전함과 동시에 주택 버블과 저금리 기조의 유지를 통해 미국의 성장세 유지에 크게 기여해왔던 해외의 포트폴리오 자금이 급속히 미국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최악의 시나리오지만 전적으로 배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왜냐하면 80년대 미·일·독(주요 유럽국가)간에 이루어졌던 플라자합의·루블합의와 같은 환율·금융협조 체제를 한, 중, 일, 대만과 미국간에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과 미국간의 환율·금융 합의는 서로간 이견의 폭이 커 어느 한쪽에 비대칭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합의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 국가들이 달러화 약세에 따른 여러 가지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국가들간 환율금융 협조체제를 강화하는 것이 시급하다. 장기적인 기본 방향은 대미 시장의존도를 낮추고 대달러 의존체제(이른바 ‘동아시아달러본위제’)의 영향력을 완화할 수 있는 ‘지역 차원의 환율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동아시아 달러본위제가 초래하는 현재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공감하고 대안적 환율체제에 대한 기본적인 컨센서스를 확립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주요 국가들간에는 환율 협조의 경험이 너무 일천하다. 뿐만 아니라 각국이 취하고 있는 환율체제와 환율정책도 너무 상이하다.

동아시아 통화당국의 과제

중국의 경우 달러당 8.28위안이라는 대달러 고정환율제는 지난 10여년간 중국 고도성장의 일등 공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무역적자에서 주요 흑자국이 차지하는 비중에서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수위를 차지했다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중국이 미국의 위안화 절상 압력과 위안·달러환유의 유연화 요구에 대해 최종적으로 어떤 안을 내놓을지 아직은 미지수지만, 위안화 절상과 유연화의 방향에는 변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절상 폭과 환율의 변동 폭이다. 특히 중국이 대안적으로 환율체제 중 하나로 모색하고 있는 통화바스켓 페그제(기존의 달러 위주 환율체제에서 탈피해 달러, 유로화, 엔화·위안화를 주요 바스켓으로 구성하는 복수통화바스켓 고정환율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대미시장과 외환시장 개입을 통한 엔-달러 환율의 조정에만 의존하지 말고 일본의 경제력에 걸맞게 시장개방과 ‘엔화의 위상 제고’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 특히 동아시아 역내에서 엔화의 위상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역내 교역에서 엔화 표시 결제 비율을 높여야 한다. 또 엔화 표시 유동성이 원활히 공급될 수 있도록 일본이 동아시아로부터 수입을 대폭 늘려야 한다. 끝으로 한국은 지금까지 등한시해왔던 동아시아 역내 차원의 환율협조 체제에 확고한 중요성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통화당국은 기존의 인플레이션 타기팅(물가수준 목표관리)제와 자유변동환율제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에서 벗어나 좀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 동아시아 주요 국가들이 달러화의 추가적인 약세와 달러 이탈에 대해 자국이 처한 상황만 앞세워 단기 미봉책으로 일관한다면 자칫 동아시아 전체가 달러 약세와 달러 이탈의 최대 희생자가 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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