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보장 받는 대신 임금 삭감하고 고용 창출… 금용권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신용보증기금의 김길동(가명)씨는 만 55살 생일을 맞은 올해 2월부터 495만원의 월급을 받고 있다. 올 1월에 받은 생애 최고 월급 660만원에 견줘 25% 깎인 수준이다. 김씨는 내년 2월부터는 360만원(생애 최고임금의 55%)을 받다가 2008년 2월부터 230만원(35%)을 받게 되며, 59살에 이르는 이듬해 2월 퇴직하도록 돼 있다.
생산성에 따른 득도 본다
이같은 김씨의 임금 체계는 노사 합의로 2003년 7월 도입한 임금피크제에 따른 것이다. 신보가 국내 처음으로 도입한 임금피크제는 일정 연령부터 임금을 단계적으로 줄이되, 퇴직 시점까지 고용을 보장해주는 내용이다. 임금 삭감과 고용 안정을 맞바꾸는 일종의 노사 타협책인 셈이다. 신보의 경우 만 55살에 이르면 일반직(지점장) 지위를 내놓고 업무 지원직으로 신분을 바꿔 전문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임금피크제를 처음 적용받는 1차년도엔 전직 전 보수의 75%, 2·3차년도 55%, 마지막 4차년도엔 35%를 받도록 돼 있다. 애초엔 54살에 최고(피크) 임금을 받고 55살부터 3년동안 순차적으로 임금을 조정하는 방식을 띠다가 금융산업노동조합의 권고에 따라 임금피크제 적용 기간을 3년에서 4년으로 1년 늘려 적용하고 있다.
신보가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첫해 대상자는 9명, 지난해엔 13명이었다. 올해 새로 임금피크제를 적용받기로 한 19명(하반기에 신청할 8명 포함)을 합치면 임금피크제 대상은 모두 41명에 이른다. 임금피크제 대신 8개월치의 급여를 추가로 받고 회사를 떠나는 명예퇴직을 신청한 직원은 지난해 4명, 올해 2명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계획대로라면 신보에서 임금피크제를 적용받는 이들은 2006년 43명, 2007년 67명 등으로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그렇다면 임금피크제의 효과는 어떨까? 임금피크제 적용에 따라 8천만원을 웃돌던 4년 동안 평균 연봉은 4300만원 수준으로 떨어진다. 회사로선 그만큼 인건비를 절감하게 돼 신입직원을 더 뽑을 여력을 갖게 된다. 인건비 절감 규모가 1인당 3700만원 수준이므로 대졸 초임 기준으로 신입 1.3명을 더 채용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신보가 2003년 신입직원 채용 규모를 애초 계획보다 60명 많은 160명으로 늘린 것은 임금피크제 도입에 따른 비용절감 효과를 감안한 것이었다. 단순 절감 규모로는 20명 정도를 더 뽑을 수 있었는데, 장기적인 효과까지 고려해 추가 채용을 더 늘린 것이라고 회사쪽은 설명했다. 신보는 지난해 60명의 신입직원을 뽑은 데 이어 올해도 지난해와 비슷한 규모의 신규 채용 계획을 잡아두고 있다. 개별 사업장의 임금피크제가 사회 전반의 일자리 창출 효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회사쪽은 임금피크제 대상자들의 생산성에 따른 득을 본 것으로 분석됐다. 2003~2004년 임금피크제 대상 22명 가운데 채권추심(빚 독촉) 업무에 종사한 18명의 회수 실적은 34억6700만원에 이르렀다. 1인당 연간 실적으로 환산하면 2억5600만원인 셈이어서, 평균 연봉(4300만원)보다 훨씬 높다. 회사로선 임금피크제 대상자가 중도 퇴직할 때보다 이익을 보는 셈이어서 계속 고용의 인센티브(유인)가 충분한 것으로 여겨진다.
임금피크제 대상자들이 예전 부하 밑에서 일해야 하는 데 따라 느끼는 심리적 열패감을 제외하면, 고용의 안정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직원들쪽에서도 비교적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분위기다. 남아무개(38)씨는 “외환위기 뒤부터 58살 정년은 말뿐이었고, 명예퇴직이다 뭐다 해서 중도에 반강제로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는데,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정년까지 일할 수 있게 됐다”며 “나도 그 나이(55살)가 되면 (임금피크제 적용을) 신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씨는 “임금피크제 대상자가 더 늘어나고 보편적인 현상으로 굳어지면 부하 밑에서 줄어든 임금을 받고 다니는 데 따른 스트레스도 차츰 해소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사실상 임금 삭감이나 현실적 방안”
임금피크제를 처음 도입한 신보의 성과가 조금씩 알려지면서 금융권을 중심으로 이를 본받는 사례가 잦아지고 있다. 수출입은행과 우리은행이 각각 올 1월, 3월부터 임금피크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산업은행이 오는 8월부터 임금피크제를 시행할 계획이다. 금융회사 감독기관인 금융감독원도 보직을 받지 못한 직원에 대해 일정 연령 이후 임금을 묶거나 깎는 방식의 임금피크제를 올해 중 도입할 예정이다.
또 공기업인 수자원공사가 지난해 7월부터 정년까지 근무나 명예퇴직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임금피크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한국컨테이너부두공단과 부산항만공사도 이 제도를 도입했다. 정부출연기관인 정보통신연구진흥원은 올 2월부터 임금피크제도를 도입해 시행 중이다.
임금피크제 실태를 들여다볼 때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일반 기업보다 금융권과 공기업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금융권에서는 앞으로도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사례가 다수 나타날 전망이다. 지난해 8월 산별(금융산업노조) 중앙 교섭에서 정년 1년 연장을 전제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할 수 있도록 해놓았기 때문이다. 이승민 금융산업노조 정책부장은 “사실상 임금 삭감인 임금피크제 그 자체를 찬성하는 것은 아니고, 금융 노동자들의 고용 불안을 해소하는 현실적인 방안을 찾는 과정에서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부장은 “정년은 58살임에도 설문조사를 해보면 노동자들이 피부로 느끼는 정년은 49~50살일 정도로 고용 불안이 심각하다”고 밝혀 고용 안정과 임금 삭감을 맞바꾸는 타협의 불가피성을 내비쳤다.
임금피크제 도입 사례가 금융권과 공사에 많은 데 대해 김정한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금융권과 공사의 임금 수준이 다른 데보다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을 우선 들 수 있다”고 말한다. 비교적 고임금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일정 연령부터 좀 깎인 급여를 받더라도 받아들일 만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사업장에 견줘 평균 연령이 높고 승진 적체가 심해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빠져 있다는 분석이 여기에 덧붙는다. 일반 사업체에 견줘 상대적으로 노조의 힘이 강해 해고가 쉽지 않고, 일정한 노하우(업무 지식)만 갖추면 고령자라도 쉽게 일할 수 있는 분야가 많다는 점도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기 쉬운 토대로 풀이된다.
김정한 위원은 “급속한 인구 고령화를 감안할 때 (금융권이나 공사와 풍토가 다른 분야로도) 임금피크제가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고령화는 사람을 쓰는 사용자나 노동을 파는 노동자 모두 더 오래 회사에 남아 일하도록 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실제 문화방송사가 국내 언론사 중에서 처음으로 올해부터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기로 하는 등 금융권과 공사 아닌 곳에서도 싹이 나타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신문> <ytn> 노사도 임금피크제를 도입한다는 데 기본적인 합의를 봤다. 또 대한전선, 대우해양조선 등 일반 기업 중에서도 임금피크제를 도입해 시행하는 예가 더러 있다.
정부도 해당 기업에 지원할 방침
정부가 임금피크제의 일자리 창출 효과를 감안해 해당 기업에 지원할 방침인 것도 이 제도의 확산을 꾀하는 요인이다. 노동부는 2월 말 국회 일자리창출특위에 보고한 ‘일자리 창출사업 추진현황’ 자료를 통해 올 상반기 중 고용보험법을 고쳐 임금피크제 도입 기업에 임금조정액의 일부를 정부가 지원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급여가 줄어드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조정지원금’(가칭)을 준다는 내용이다.
물론, 노동계 전반적으로는 임금피크제에 대한 거부감이 아직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정년을 그대로 두면서 임금만 삭감하는 방식으로 노동자쪽에 불리하다는 점에서다. 실제 우리보다 앞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해 실시하고 있는 일본의 경우 임금피크제 도입 대신 정년을 법정보다 1살 많은 61살로 늘려 시행하는 반면, 우리나라에선 대체로 기존 정년 57~58살을 보장하는 방식의 임금피크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변화의 기운은 엿보인다. 신용보증기금이 올해부터 임금피크제 대상자의 정년을 1년 연장하기로 했으며, 우리은행은 올 3월 시행 때부터 정년을 57살에서 1년 연장한 임금피크제를 실시하고 있다. 높아지는 고용 안정 욕구, 고령화 추세 등에 비춰볼 때 정년 연장형 임금피크제가 차츰 늘어날 것이란 관측을 낳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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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연구원 김동배 연구위원이 지난 2월25일 노동연구원 임금직무혁신센터 개소 기념 토론회에서 제시한 보고서 ‘임금 체계에 대한 근로자 선호’에 그 실마리의 일단이 드러나 있다. 당시 보고서는 110개 사업장 2026명에 대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설문조사 결과, 임금피크제가 ‘필요하다’는 응답이 47.3%로 반대(20.5%)보다 훨씬 높았다. 그렇지만 ‘잘 모른다’는 유보 의견이 32.2%에 이르러 이 제도의 취지나 배경에 대한 이해도는 아직 낮은 것으로 평가됐다. 임금피크제가 필요하다고 응답한 경우 피크 연령(최고 임금을 받는 나이)은 평균 53.7살, 피크제 종료 때 적절한 임금은 피크 임금의 61.9%로 나타났다. 평균 정년을 56~57살로 본다면, 임금피크제를 적용받는 3~4년 동안 해마다 10% 정도의 임금 하락을 감수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임금피크제가 필요하다는 응답을 연령대별로 보면, 40대가 53.7%로 가장 높았으며 30대 51.3%, 50대 42.9%, 20대 36.1% 순이었다. ‘불필요하다’는 응답은 연령대별 차이 없이 20% 안팎(19.7~21.0%)인 반면, ‘잘 모른다’는 응답의 격차는 커(25.4~44.2%) 임금피크제에 대한 선호도 차이가 주로 제도의 취지나 배경에 대한 이해 수준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됐다.
직군별 임금피크제 선호를 보면, 사무·관리·영업 부문에서 높아 50.9%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연구·개발·기술직은 47.5%, 생산직은 32.7%만 필요하다고 답해 직군별 고용 불안의 격차를 드러냈다. 또 임금 수준과 임금피크제 선호도는 정확히 비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월 임금 400만원 이상인 경우 임금피크제 찬성은 69.8%, 300만~400만원 62.2%, 200만~300만원 48.9%, 100만~200만원 37.0%였다. 100만원 미만에서는 찬성률이 30.1%로 낮았지만, 반대(17.9%)보다는 높았다.
김동배 위원은 “임금피크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필요하지 않다는 응답보다 두배 이상 높게 나타날 뿐 아니라 근로시간 단축, 교육·훈련 등 다른 근로 조건 개선과 임금 인상을 맞바꾸겠다는 뜻도 많은 것으로 조사된다”며 “기업이 근로자에 대한 보상 체계를 짤 때 이를 감안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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