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氣uP! | 벽산]
기업 핵심인 석고보드 공장 매각하고 위기 넘긴 (주)벽산…고용 불안 해결 위해 사내 기업가 제도 운영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외환위기 이듬해인 1998년 12월 (주)벽산에는 침통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건축자재 전문업체인 이 회사의 간판이나 마찬가지인 석고보드 공장(전남 여수, 경남 진해, 중국)이 프랑스계 라파즈에 팔린 때였다.
매각 협상에 참여하고 최종 합의서를 작성한 김건주 상무(당시 전략팀장)가 “생살을 도려낸 느낌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석도보드 사업은 벽산의 알짜 부문이었다. 이 때문에 직원들 사이에선 “이제 벽산은 끝났다”는 자조가 흘러나왔고, 석고보드 사업 매각을 강행한 김재우 사장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이 잇따랐다.
설비 증설이 부메랑으로
1958년 설립돼 1977년 국내 처음으로 석고보드를 생산해 종합 건축자재 업체로 명성을 쌓아온 벽산은 외환위기 직전까지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1995년만 해도 방음·단열재인 ‘미네랄 울’에 대한 주문이 밀려들어 휴일 없이 공장을 돌려야 했다. 생산량이 주문을 미처 따르지 못하자 회사는 이듬해 제조라인 증설 작업을 벌여 미네랄 울의 연간 생산 규모를 업계 최고 수준인 5만t으로 늘렸다. 임직원들은 업계 최고 설비를 갖췄다는 자부심으로 장밋빛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1년도 채 안 돼 꿈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설비 증설 과정에서 당겨쓴 빚이 외환위기를 맞아 회사를 옥죄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1997년 당시 차입금(1816억원)이 매출(1870억원)에 맞먹은 데서 볼 수 있듯 차입금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과다했다. 금리와 환율 폭등에 따른 유동성 위기에 매출 감소가 겹치자 회사는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지경에 빠져들었다.
회사가 수렁에서 헤매고 있던 1998년 초 대주주인 김희철 벽산그룹 회장은 고심 끝에 삼성물산 부사장 출신인 김재우씨를 ‘구원투수’로 불러들였다. 김 사장은 삼성물산의 총매출이 2억달러 정도에 머물고 있던 시절(1975년) 단일 계약 1억100만달러의 수주를 올린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벽산의 새 사령탑에 오른 김 사장이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회사의 몸피를 줄여나가는 것이었다. 수익을 내지 못하는 부실 사업에서 철수하고, 부동산을 비롯해 돈 될 만한 자산을 대거 내다팔았다. 출시 때부터 적자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핑크월, 미장보드, 패션보드는 곧바로 생산을 중단했으며, 주택 배관재(온돌용·온수용)로 쓰이는 PPC파이프와 X-L파이프 사업은 중소기업으로 넘겼다. 시공 및 주택사업에서도 철수했다. 회사는 1998~2001년까지 이같은 자산매각을 통해 500여억원의 현금을 확보함으로써 생존의 숨통을 확보했다.
여기까지는 여느 회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조정 사례일 뿐이며, 벽산만의 독특한 실험은 정작 따로 있었다. 우선은 회사의 핵심 부문인 석고보드 사업을 외국 자본인 라파즈에 넘긴 일을 들 수 있다. 매각 당시의 논란과 달리 석고보드 공장 매각은 수렁에 빠진 벽산을 건져내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벽산의 석고보드 공장은 두 가지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 우선, 다급한 상황에서 매각에 나섰음에도 제값을 받아냈다는 점이다. 공장의 장부 가치로 180억원 정도였는데, 최종 매각 값은 700억원(일시불 400억원, 5년간 석고보드 판매 수수료 300억원)으로 결정됐다. 매각 협상 초기 500억원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비교적 높은 수준에서 타결된 셈이다. 이는 외국 자본과 제휴를 추진하기 전에 메타브랜딩(기업가치 평가 및 브랜드 네이밍 회사)으로부터 ‘벽산’ 브랜드 가치가 3천억원에 이른다는 평가 결과를 받아놓은 데서 비롯된 바 컸다. 제3의 평가 기관에서도 높은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음에 따라 자신감 있게 협상안을 밀고 나가 제휴 자본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장 매각 때 판매권은 그대로 유지
석고보드 공장 매각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대목은 매각 합의서에 덧붙은 조건이다. 석고보드 공장을 팔되 여수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전체 물량의 절반 수준)은 5년 동안 벽산에서 독점 판매하며, 300억원의 판매 수수료를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공장은 팔았지만, 석고보드 사업은 사실상 그대로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김재우 사장은 “석고보드 사업 매각으로 700억원의 현금 흐름을 해결해 빚 부담을 크게 덜었을 뿐 아니라 라파즈의 독점 판매 대리점으로서 세계화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라파즈에 석고보드 공장을 팔면서 판매권은 그대로 유지하는 조건을 얻어내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당시 석고보드 업계 세계 5위의 라파즈는 아시아 시장 확보로 세계 3위에 진입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벽산에 판매권을 줄 이유가 없었다. 벽산이 라파즈를 설득한 논리는 ‘3자 구도론’이었다. “벽산이 자산 매각 뒤에도 벽산 브랜드로 여수 공장 생산 제품을 전량 판매한다면 3자(KCC·라파즈 코리아·벽산) 경쟁 구도가 그대로 유지돼 경쟁사의 시장점유율을 40%로 묶어놓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해외의 제3자 진출도 막을 수 있다.” 협상은 벽산의 뜻대로 진행됐으며, 지금도 각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절반은 ‘벽산 석고보드’, 나머지 절반은 ‘라파즈 석고보드’란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
벽산이 핵심 사업 부문까지 내다팔 정도의 강력한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골머리를 앓은 대목은 고용 불안 문제였다. 사업과 공장의 매각, 영업 구조 재편 탓에 대규모 인원 감축이 불가피했다. 회사는 고용 불안을 최소화하는 방안으로 사내 기업가 제도를 도입했다. 영업 부문에서 발생한 100여명의 유휴 인력을 개인 사업자로 탈바꿈시켜 기존 거래처를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특판부2과 과장에서 사내 기업가로 변신한 유한열 수테크(주) 사장은 “매출이 일어날 때마다 곧바로 우리 이익으로 연결되니 신이 난다”고 말했다. 유 사장의 수테크는 수출담당 직원을 포함해 2명의 직원을 두고 있으며 한해 30억~4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 회사는 건축자재에서 나아가 전기 애자, 케이블로 취급 품목을 넓히고 있다. 유 사장은 “벽산에 15년 동안 재직하는 과정에서 독립하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외환위기가 좋은 계기가 됐다”고 만족스러워했다. 사내 기업가로 독립할 당시 유 사장과 함께 벽산건재판매(주)를 차렸던 부하 직원 2명은 그 뒤 독립해 그보다 더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다고 유 사장은 귀띔했다.
120명 독립, 영업 호조
1997년 당시 직원 규모가 917명에서 2001년 417명까지 줄어드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충격을 크게 덜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사내 기업가 제도에 힘입은 바 컸다. 이는 석고보드 공장 매각 때 고용 승계 요건을 붙인 것과 함께 경영진에 대한 직원들의 신뢰를 높였다는 평이다. 사내 기업가로 독립한 이들의 상황은 전반적으로 좋은 편이다. “120명이 독립하면서 66개 업체를 차렸는데, 지금은 70개에 이르고 있다. 5개가 부도로 없어진 반면, 영업 호조로 분사한 곳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제일 작은 곳의 한해 매출이 30억원이며, 100억원에 이르는 큰 곳도 있다.”(김건주 상무)
벽산은 1998년 300억원 적자에서 1년 사이에 흑자로 돌아선 데 이어 2003년부터는 100억원을 훌쩍 넘는 흑자를 내고 있다. 지난해 극심한 건설 경기 불황 속에서 130억원의 흑자를 거둘 정도로 기반을 탄탄히 다졌다. 김재우 사장은 이런 중에도 “자만은 독약과 같다”며 “과거 영광에 취해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일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문단속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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