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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와 대기업의 ‘첫키스’

등록 2004-10-15 00:00 수정 2020-05-03 04:23

기업 사회공헌 실무책임자들과 NGO 대표들이 처음 한자리에…서로에 대한 오해 풀 수 잇는 계기

▣ 제주=곽정수/ 한겨레 대기업 전문기자 jskwak@hani.co.kr

“진정한 전략적 파트너십이냐, 아니면 적과의 동침이냐.”

국내 대기업의 사회 공헌 실무책임자들과 비정부기구(NGO) 대표들이 공식적으로는 처음 한자리에 모였다. 기업과 NGO의 관계는 흔히 견원지간에 비유된다. 대화나 협력보다는 아직 갈등과 긴장이라는 말이 둘 사이를 설명하는 데 더 어울리는 게 우리 현실이다. 지난 10월9일 제주도에서 열린 ‘사회 공헌을 위한 기업과 NGO들의 유쾌한 만남’은 이런 상식의 틀을 깨는 신선함과 떨림의 현장이었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개혁적 시민단체들의 전국적 연대모임인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가 ‘유쾌한 만남’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모임 자체가 7일부터 제주에서 열린 전국시민운동가대회 행사 중 하나로 기획됐다. 기업쪽에서는 국내에서 사회 공헌을 주도적으로 하고 있는 곳들이 대부분 망라됐다. 올해로 사회봉사단 출범 10주년을 맞는 삼성을 비롯해 LG전자, SK텔레콤, 현대차, 포스코, KT, 한화, CJ, 교보생명, 이랜드 등 모두 사회 공헌을 적극 전개하고 있는 기업들이다. 시민사회단체와는 앙숙인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도 자리를 함께했다.

사회공헌으로 하나가 된다

상식적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만남이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사회 공헌이라는 ‘매직’(마법)이었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기업들이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NGO들과 전략적 제휴를 맺고 사회 공헌을 함께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국내 대기업과 NGO들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다. 대기업과 NGO 모두 상호 불신과 오해, 부정적 선입견으로 가득하다. 일부 기업들이 NGO들과 사회 공헌을 같이한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복지·환경 등 아주 제한된 분야에서, 그것도 초보적 수준에 그쳐왔다. 아직도 일부 시민사회단체는 대기업의 지원을 받는 것을 금기시한다.

9일 오전 10시가 조금 지난 시각. 예정 시각을 약간 넘겨 ‘유쾌한 만남’이 열린 제주 한화콘도 회의장은 NGO와 기업 대표자들 70여명으로 가득 찼다. 이인경 시민연대회의 사무국장은 “시민운동가들의 다양한 관심사에 대해 논의하는 ‘이야기마당’에 속한 7개 행사 중에서 ‘유쾌한 만남’에 참석 신청을 낸 NGO들이 가장 많았다”고 귀띔했다.

먼저 환경연대 운영위원이기도 한 김민주 리드앤리더 대표가 ‘기업과 NGO, 공익을 위해 만나다’라는 주제 발표로 딱딱한 분위기를 풀었다. “그동안 기업과 NGO들은 서로 싸우고 투쟁하며 평행선을 달려왔다. 하지만 사회 공헌은 기업과 NGO들이 서로에 대한 부정에서 벗어나 하나로 힘을 모으는 장이 되고 있다.” 김 대표는 외국 기업과 NGO들의 다양한 사회 공헌 협력 사례들을 소개했다. 호텔 투숙객들이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은 만큼 ‘그린 코인’을 적립해 나무심기 프로젝트에 기부하는 일본 아카사카 액셀 도큐 호텔의 ‘그린 마케팅’부터, 피자 한판을 먹을 때마다 25펜스(약 450원)를 이탈리아 베네치아시를 위해 기부하는 ‘피자 익스프레스’의 공익마케팅을 거쳐, ‘깨끗한 등산’을 기치로 내걸고 바위에 박아서 사용하는 피톤 대신 제거가 가능한 등산안전기구 초크를 개발해 대성공을 거둔 파타고니아의 환경경영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는 한라시멘트가 프랑스 라파즈그룹에 인수된 뒤 지난 10년간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백두대간보전회’와 대타협을 통해 환경보호를 위한 공동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사례가 눈길을 끌었다. 김 대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분위기는 갈수록 강조될 것”이라며 “기업들은 NGO들을 적대시하지 말고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하며, 단독으로 사회공헌 캠페인을 하기보다는 NGO와 제휴를 추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제언했다.

협력사업에 대한 우려도 드러내

선도적으로 국내 기업과 NGO간에 파트너십을 열어가는 사례들이 소개되면서 마음에 담아놨던 솔직한 얘기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유덕종 한화 사회공헌팀장은 ‘남북 어린이 어깨동무’와 함께 펼치고 있는 ‘북한 어린이 지원사업’을 소개하며, “기업인은 뿔 달린 늑대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유 부장은 “기업은 돈만 대라, 일은 우리(NGO)가 한다는 식의 일부 NGO의 태도는 곤란하다”고 꼬집기도 했다. 그러나 유 부장은 “우리 사회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기업과 NGO간의 기싸움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며 “자주 만나 얼굴을 맞대는 것이 서로의 오해를 풀고 신뢰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희망을 강조했다. 이랜드 복지재단의 정영일 사무국장은 “NGO들도 사회 공헌 사업과 관련해 분명한 목표와 성과지표를 가져야 한다”며 “지원 요청도 적절하고 합리적이어야 하고, 사업 진행 과정과 종료 이후 결과 보고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라고 주문했다. 흔히 가치중심적인 NGO들과 성과중심적인 기업간의 시각차로 인한 갈등을 염두에 둔 지적이다. 기업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지원기업을 배려한 홍보의 필요성”도 빠지지 않았다. 사회가 칭찬을 하면 기업도 더욱 신이 나서 사회 공헌을 할 것이라는 설명이 곁들여졌다.

한국여성재단의 강경희 사무총장은 2년째로 접어든 교보생명과의 사회 공헌 협력사업을 “첫사랑의 아련한 사연을 말하는 심정으로 소개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강 사무총장은 “‘기업과 NGO가 드디어 함께 가는구나’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뛴다”며 “이 사랑이 혹시 짝사랑은 아니겠지요”라며 벅찬 기대를 표현했다.

한껏 부드러워진 회의장도 지금종 문화연대 사무총장이 단호한 목소리로 기업과 NGO간에 잊어서는 안 될 원칙을 강조할 때는 일순 긴장감이 돌았다. CJ와 함께 문화 소외층들을 위한 ‘나눔의 영화관’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지 사무총장은 “건강한 비판과 생산적 견제라는 NGO의 원래 역할이 잊혀져서는 안 된다”며 “사회 공헌이 기업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나 기업에 대한 비판을 무디게 만들기 위한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기업들이 많은 이익 중에서 일부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차원을 넘어 진정으로 사회적 책임을 인식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지 사무총장은 기업과 NGO간의 협력사업이 최근 일부 힘있는 NGO에게 집중되면서 시민사회 내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우려도 숨김없이 드러냈다.

폭넓은 분야에서 협력 모색할 계기

모든 일이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하지만 그동안 상호 불신과 오해 속에서 껄끄러운 관계였던 기업과 NGO들이 적어도 사회 공헌 분야에서는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확인한 뜻깊은 자리였다. 짧은 만남에서 오는 아쉬움은 자연스럽게 또 다른 만남으로의 기대로 이어졌다. 시민연대회의의 공동대표인 이강현 볼런티어21 사무총장은 “NGO들이 기업에 대한 비판과 견제라는 본연의 역할을 지키면서도, 상호 불신의 벽을 뛰어넘어 기업들과 파트너십을 이뤄 사회 공헌 사업에서 협력하는 게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양용희 교수(호서대 사회복지학과)도 “지금까지 기업과 시민사회단체간 사회 공헌 협력이 조용히 드러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이뤄져왔다면 앞으로는 더 폭넓은 분야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활발히 협력을 모색하는 본격적인 탐색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유쾌한 모임’의 참석자들 모두 새로운 파트너와의 감미롭지만 위험할 수 있는 첫 키스의 추억을 가슴에 안고 귀로에 올랐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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