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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의 비상구, 소득재분배

등록 2004-07-29 00:00 수정 2020-05-03 04:23

‘친빈곤 성장’에 관심 기울여야 할 때… 근로빈곤층에 소득 보장해주는 EITC 도입 불가능한가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우리나라는 과거에 평등한 분배를 통해 높은 경제성장을 이룬 대표적인 사례로 꼽혀왔다. 1960년대에 우리나라와 필리핀의 자본 축적 수준과 저축률 지표 등이 거의 똑같았는데도 한국이 더 빠른 경제성장을 이룬 건 분배가 평등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와 있다. 물론 한국전쟁 이후의 ‘빈곤에 의한 평등’이란 측면이 강했지만, 그동안 한국은 분배가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모델로 주목받았다.

“분배 불평등이 성장 짓눌러”

그러나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사정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제는 오히려 분배 불평등이 성장을 가로막는 동맥경화증을 낳고 있다. 한국은행은 최근 ‘경제 양극화의 원인과 정책과제’라는 보고서를 통해 “임금과 소득 등에 걸쳐 우리 경제의 양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면서 “인적자본 육성 중심의 ‘성장촉진형 재분배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은행의 보고서는, 성장이냐 분배냐를 둘러싼 논란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지만 “분배 불평등이 경제성장을 짓누르고 있다”는 논리가 갈수록 힘을 얻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제성장이 분배를 개선해왔던 연결고리가 이미 깨진 것인데, 넘쳐 흐르는 물이 바닥까지 고루 적시듯 선도 부문의 경제적 성과가 늘면서 저소득층에게도 혜택이 돌아가는 이른바 ‘트리클 다운’(trickle down) 효과가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려면 소득재분배를 통해 성장을 촉진하는 ‘사회통합적 경제성장’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현재 우리 경제에서 분배 문제는 일하면서도 빈곤한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소득을 기준으로 보면 전인구의 10.2%(2000년 기준)가 절대빈곤이고, 저임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56%를 차지한다. LG경제연구원 송태정 연구위원은 “경기 양극화의 이면에는 소득 양극화가 자리잡고 있다”며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고임금층이 급격히 늘어나는 대신 비정규직이 급증하면서 중간임금층 상당수가 저임금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자리에서도 고임금을 받는 상위 30% 일자리와 하위 30% 일자리가 동시에 크게 늘면서 양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임금과 고용의 양극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 하준경 과장은 “소득의 양극화가 가속화돼 빈곤층이 1%포인트 늘어날 때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약 0.22% 감소한다”며 “소득 하위층의 자녀 교육 투자가 크게 부족해 경제의 성장잠재력이 떨어지고 있는데, 하위계층의 인적자본 투자를 증가시켜주기 위한 재분배 정책을 펴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훈련을 통한 인적자본은 경쟁력의 핵심이자 시장에서 소득격차를 낳는 주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득 불평등 심화에 따라 근로빈곤층의 인적자본 투자는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국가가 법정 최저임금을 높인다 하더라도 중소·영세기업의 경우 실제로 임금을 높여줄 여력이 없는 한 ‘시장’에서 소득을 보장받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절대빈곤층과 차상위빈곤층을 포함해 근로빈곤층의 소득을 보장해주는 정책이 필요하다.

근로빈곤층을 주요 대상으로 한 이른바 ‘친(親)빈곤 성장’ 정책으로 요즘 간간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 ‘근로소득보전세제’(EITC·Earned Income Tax Credit)다. EITC는 일정 수준 이하의 근로소득을 가진 가구에 정부가 정해진 기준에 따라 조세제도를 통해 현금을 지급하는 소득보장제도이다. 저소득층을 빈곤선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직접적인 수단으로서, EITC 수급 자격이 되려면 근로소득(임금소득 및 자영업자 순소득)이 있어야 한다. 조세연구원 전병목 연구위원은 “모든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현행 근로소득공제 이외에 하위소득 계층만을 대상으로 한, 적극적인 EITC 소득재분배 제도를 도입해야 저소득층에 대한 실질적 지원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EITC는 ‘조세제도’라는 점에서 공적 부조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다르다. 또 현행 연말정산 제도가 실제로 낸 세금 중에서 일부만을 돌려받는 것인 데 반해, EITC는 세부담액보다 EITC 급여액(세액공제액)이 더 커서 마이너스가 될 경우 그만큼을 환급해주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저소득 계층에게 국가가 일정한 비율로 소득을 추가 보전해주는 식이다. 미국 등 조세 선진국은 대부분 공공부조 정책만으로는 한계가 드러나자 조세 제도를 병행해 EITC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상자기사 참조).

경기대 박능후 교수(사회복지학)는 미국 EITC 기본구조를 본떠 우리나라에서 빈곤선(최저생계비)의 0∼160% 범위의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이 제도를 실시할 경우, EITC 수급 가구는 임금노동자가구와 자영업자 가구를 합쳐 23.8%(이 중 임금노동자가구 21.6%로 약 205만가구)가 될 것으로 추정했다. 간략하게 살펴보면, 빈곤선이 월 100만원이라고 할 경우 월 50만원 소득자까지는 가구가 벌어들인 소득의 최고 40%(50만원×0.4=20만원)까지 국가가 추가로 보태줘 월 70만원으로 만들어주고, 월 소득 50만∼80만원 가구는 빈곤선의 20% 수준인 최대급여액(월 20만원)을 일률적으로 받고, 월소득 80만∼160만원 가구는 받는 EITC 급여혜택이 점차 줄어들어 월 160만원가구는 급여가 0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설계할 경우 연간 소요 예산은 전체 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하면 3조2958억원, 임금노동자가구만을 대상으로 하면 2조136억원이 들 것으로 추정됐다. 박 교수는 “EITC는 차상위층에 밀집해 있는 근로빈곤 계층 해소를 위한 것”이라며 “재정적 부담은 제도를 어떻게 디자인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대기업이나 고소득층에 대한 조세 감면 규정을 조정하면 2조원 정도의 추가 재원은 충분히 조달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재경부 “소득 파악 어렵다”

사실 EITC 도입은 노무현 정부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다. 청와대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 김재진 박사는 “노동과 복지쪽에서는 EITC 도입에 공감하고 있는 반면, 재경부쪽에서는 재정 부담과 소득 파악의 어려움을 들어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EITC는 일해서 번 만큼 일정 비율로 국가가 소득을 더 높여주는 것이므로 놀고 먹는 사람들에 대한 비생산적 퍼주기라는 비판도 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재경부는 EITC 도입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않고 있다.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빈곤 문제’에 대해 특별히 발언한 일도 드물다. 재경부 이경근 소득세제과장은 “EITC가 어떤 제도인지 알아보기는 했지만, 저소득층에 대한 소득 파악이 제대로 안 되는 상황에서 도입이 가능할지 등을 깊이 따져본 것은 아니다”며 “기본적으로 보건복지부쪽의 사회보장제도 성격이 강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나 김재진 박사는 “이 제도가 실시되면 일정한 기준소득 이하 가구는 소득이 많을수록 더 많은 환급을 받기 때문에 소득 증빙자료를 성실하게 신고할 것”이라며 “객관적 소득 파악이 가능한 저임금 노동자부터 우선 실시한다면 기술적으로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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