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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건강, 현대차에 양보하다?

등록 2004-07-09 00:00 수정 2020-05-03 04:23

대형 상용차의 배출가스 규제 조처 늦추기로… 기술 개발에 차질 빚는 현대자동차 배려

▣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요즘 기업 경영자들은 ‘시장’을 신(神)의 위치로까지 끌어올린다. 시장은 정부의 개입 없이 그 자체의 논리대로 흘러갈 때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시장에 대한 정부의 어떤 개입도 악이라고 강조하며, 모든 규제의 철폐를 요구한다. 물론 그들이 폐지를 요구하는 규제란 노동자나 소비자, 혹은 기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장치다. 그러나 기업 경영자와 그들을 편드는 논객들은 정부의 개입이 자본의 이익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때는 침묵하거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기도 한다.

기업부터 생각하는 자동차정책

우리나라의 자동차 관련 정책은 정부의 시장 개입이 기업의 이익을 우선 보호해온 대표적인 사례다. 철도가 도로에 비해 에너지 효율이 몇배 높지만, 역대 정부는 철도보다 자동차를 위한 도로 확장에 더 중점을 뒀다. 아무리 교통 정체가 심하고 주차난이 심해도 자동차의 공급을 억제하는 정책을 쓴 정부는 없다. 자동차 운행 10부제나 요일제는 돈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차를 한대 더 사도록 유도한다. 이런 정책 방향은 자동차산업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매우 높다는 데 바탕을 두고 있다. 하지만 자동차 회사들은 정부의 이런 정책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큰 혜택을 누리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단지 자기네가 사업을 잘해서 돈을 잘 버는 것이라고 우긴다.

정부가 특정 회사를 위해 정책을 펴는 일도 있다. 정부는 지난 7월1일 경제장관간담회를 열고 애초 이날부터 적용할 예정이던 대형 상용차의 배출가스 규제 조처를 두달간 늦추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이를 위해 대기환경보전법 시행규칙을 서둘러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두달간 한시적으로 규제가 유예되는 대상 차종은 경유를 연료로 하는 트럭과 버스 중 총중량 3.5t 이상인 차량이다.

경유 차량의 배출가스 규제는 지난해 2월 정부와 전문가, 민간단체들이 경유 승용차 도입을 앞두고 합의한 사항이다. 우리나라 수도권의 대기오염 정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악이고, 가장 심각한 대기오염 물질인 미세먼지가 선진국의 주요 도시에 비해 3.5배 이상 수준으로 발생한다. 이는 주로 경유 차량으로 인한 것이어서, 경유차의 배출가스 규제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런데 어렵게 합의한 약속을 정부는 왜 파기했을까? 산업자원부는 “강화된 배출가스 기준에 기술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달라는 자동차업계 등의 건의를 감안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환경단체들은 이번 조처가 현대자동차를 배려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대자동차를 제외한 다른 모든 상용차 회사들은 강화된 기준에 맞춰 기술개발을 완료했으나, 현대차는 다임러크라이슬러와의 상용차 엔진 합작계약이 무산되면서 엔진 개발 일정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것이다.

초저황 경유 도입도 유보

녹색소비자연대, 가톨릭환경연대, 서울환경운동연합, 녹색교통운동 등 8개 환경운동단체로 구성된 ‘블루 스카이 운동’은 7월1일 성명을 통해 “현대자동차의 로비에 재경부 등 경제부처까지 나서는 등 국민 건강을 담보로 한 현대자동차 봐주기가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약속 위반은 이것만이 아니다. 7월부터 시행하기로 한 초저황 경유의 도입이 유보됐고, 에너지 상대가격 체계 조기 개편 문제도 마무리되지 않고 있다.

환경보호와 산업보호 가운데 무엇을 더 우선해야 하는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정부 정책이 국민에게 손해가 되는데도 특정 산업이나 기업을 배려하는 것이라면, 그로 인해 생기는 특별 이득이 사회에 환원되도록 정부나 기업은 애써야 한다. 하지만 현대차에서 그런 일은 그동안 없었고, 이번에도 없다. 정부의 이번 조처는 단지 ‘현대차의 막강한 파워’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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