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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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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터'는 무엇으로 먹고 사는가

등록 2000-08-30 00:00 수정 2020-05-02 04:21

정규직 거부하는 자발적 백수들 “밞 굶더라도 좋아하는 일은 해야 한다”

일주일에 한 차례 시장보기(2만∼3만원씩), 초고속통신 사용료(3만5천원), 전기세(1만∼2만원), 전화세(1만원), 기타 자잘한 공과금과 교통비 등.

게임 애니메이터 지호태(29·서울 신도림동)씨의 한달 필수 지출품목이다. 모두 합해 15만원에서 20만원이면 된다. 영화를 보거나 책, 음반, 필요한 물건을 사는 비용을 합해도 한달 생활비는 40만∼50만원을 넘지 않는다. 지씨는 원체 집 밖에 나가는 걸 싫어하는데다, 일감도 이메일로 주고받으니 맘먹으면 며칠씩 집에서 두문불출할 수 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한다. 8월24일에는 비가 잔뜩 온다는 소리를 듣고도, 만사 제쳐두고 직장생활을 하는 여자친구의 휴가에 맞춰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다.

좋아하는 일, 죽어도 해야 한다

지씨는 기계설계를 전공했지만 대학졸업 뒤에는 만화동아리 활동을 하며 쌓은 실력으로 밥벌이를 해왔다. 1년반가량 직장생활을 했지만, 꽉 짜인 규율과 답답한 분위기를 견딜 수가 없어 미련없이 그만두었다. 그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앞으로도 취직은 안 할 생각이다.

한때 ‘창조적 백수’라는 말이 유행했다. 미취업이든 실업이든 자기가 처한 상황을 최대한 즐겁고 의미있게 활용하자는 구호로 제기됐던 말이다. IMF라는 엄혹한 시대에 크든 작든 고용불안을 느낀 사람들은 이 말에서 많은 위안을 받았다. 그뒤로 사람들 입길에 오르내리며 백수라는 단어는 자연스레 하나의 커리어로 인정받게 됐다. 물론 심리적인 커리어다.

세월이 흘렀다. 여전히 취업문제는 젊은이들의 주된 관심사이지만, 취업 안 한 젊은이들 가운데 독특한 색깔을 지닌 이들이 보인다. 스스로를 미취업자가 아닌 비취업자들이라 부르는 이른바 ‘자발적 백수’들이다. 이들은 앞서 지씨의 경우처럼 비정규 노동으로 최소 생계를 꾸리고 남는 시간은 전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쓴다. 실업 수당도 안 타고 취직 노력도 안 하는 까닭에 노동부 통계에는 잡히지 않지만, 20대 젊은이들 가운데 주위에 이런 친구 한둘씩 안 둔 이들은 없다.

경기 광명시 하안동 7단지 아파트의 비디오가게에서 일하는 정지근(27)씨. 비정규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린다는 점에서는 지씨와 마찬가지지만 그는 단순노동으로 생계를 해결한다. 저녁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꼬박 8시간을 일하고 임금은 우리나라 한달 최저임금(42만여원)을 조금 웃돌게 받는다. 하지만 정씨는 이 생활에 만족한다. 눈 뜨자마자 좋아하는 음악을 하루종일 맘껏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씨는 록음악 마니아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곧장 컴퓨터에 CD를 밀어넣은 뒤 집안에서도 하루종일 무선 헤드폰을 끼고 돌아다닌다. 아침 겸 점심과 이른 저녁까지 웬만하면 집에서 떼우니 밥값도 안 들고, 5∼6km쯤 떨어진 비디오가게에는 자전거를 타고 오가니 교통비도 거의 안 든다.

대학을 중퇴한 뒤부터 정씨는 아르바이트라면 안 해본 게 없다. 용산 전자상가 부품 배달, 뷔페식당 서빙, 염료통 하역일, 편의점 판매, 건설현장 노가다 등. 그중에도 염료통 하역일이 제일이었다고 꼽는다. 꼬박꼬박 일당받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음악을 꽝꽝 틀어 놓고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통당 27kg이 넘는 무게이지만 요령만 익히면 할 만하다고 말한다. 성격도 밝고 재기가 많아 함께 일하자며 손짓하는 ‘형님’들이 많지만 그는 고개를 흔든다. “직장에 다니면 음악을 들을 수가 없잖아요.”

몸에 배인 ‘돈 안 쓰는 법’


(사진/프리터 정지근씨의 방.아침에 눈뜨자마자 컴퓨터에 CD를 밀어넣은 뒤 무선 헤드폰은 끼고 하루를 보낸다(사진 위). 애니메이터 지호태씨는 집 밖에 나가는것 싫어한다.그는 돈 적게 쓰는 게 몸에 배어있다.지씨는 좋아하는 만화로 밥벌이를 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한다)

정씨와 지씨처럼 직업보다는 취향에 더 큰 의미를 두는 이들의 닮은점은 출퇴근에 얽매이기 싫고, 비합리적이고 권위적인 조직생활에 스트레스받기도 싫고, 미래를 위한 투자나 안정적 경제생활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또 대부분 영화든 음악이든 만화든 마니아적 감성을 쏟는 대상을 하나씩 지니고 있다. 하지만 각자가 처한 조건과 처지는 다양하다. 애니메이터인 지씨는 일을 많이 하면 200만∼300만원도 벌고, 일 안 하고 놀면 한푼도 못 번다. 일감의 양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 150만원은 번다. 비디오가게에서 일하는 정씨는 최저임금을 버는 정도.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돈 쓰는 일에는 취미가 없다. 먹고살 만큼만 벌면 된다는 쪽이다.

“미래를 위한 투자요? 돈이라면 저는 쓸 만큼만 떼고 남는 돈은 어머니 드려요. 알아서 쓰시라고.”(지호태)

“5일 뒤도 모르는데 5년 뒤 걱정을 어떻게 하겠어요.”(정지근)

이런 대답을 한다고 해서 이들을 대책없는 젊은이들로만 볼 수는 없다. 두 사람은 남보다 잘 나고 돈버는 데 연연하지 않을 뿐이다. 대신 만화 한장을 더 그리고, 레드 제플린의 음악을 한번 더 듣겠다는 쪽이다. 따라서 공히 ‘돈 안 쓰는 법’이 몸에 배어 있다. 멀리 여행을 떠난다거나, 비싼 물건을 구입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심지어 정씨는 동네인 시흥동 일대나 종로쪽에서 주로 논다. 집앞에 있는 버스노선에 따른 동선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학교를 마친 뒤부터는 단 한 차례도 부모에게 손 내민 일이 없다. 용돈이든 생활비든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스스로 해결해왔다. 이런 점에서 부모의 경제력에 의존해 사는 젊은 ‘유한계급’들과는 구별된다.

일본에서는 직업없이 아르바이트로 최소 생계비를 벌고 나머지 시간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사는 이런 젊은이들을 일컬어 ‘프리터’(프리 아르바이터의 일본식 합성어)라고 부른다. 최근 그 수가 늘고 있다고 호들갑이다. 일본 노동부 발표에 따르면 이런 젊은이들은 150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노동시장에서 파트타임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가고 젊은층들의 문화적 취향도 점차 깊고 넓어지는 가운데 ‘프리터’군의 확산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부산대 사회학과 김문겸 교수는 “자본주의 기술개발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시민사회가 성숙될수록 각 개인의 개체성은 필연적으로 강화된다. 디지탈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은 노동과 놀이에 대해 기성세대와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기존 잣대로 가치판단을 하기 어렵다. 그들의 취향은 직업관에서부터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가정부 일을 두드린 대졸 여성

일군의 프리터들은 ‘다모작’ 삶을 추구한다. 두 가지 이상의 직업을 동시에 갖는 경우다. 하나는 진짜 하고 싶은 일, 다른 하나는 단순한 생계유지 수단이다.

서울 신림동에 사는 허상례(26)씨는 친구들에게 “격일제로만 일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허씨는 가능한 한 매일매일 연속으로 하는 일은 피한다. 피곤하기도 하고 시간을 활용할 수 없는 탓이다. 통신회사 통신검수, 카운터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섭렵하던 그는 최근 맞춤한 자리를 얻었다. 매주 월, 수, 금요일마다 서울 일원동의 한 한자교습학원에 나가 초중고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전공인 중어중문학을 살리는데다 격일제이기 때문에 시간을 최대한 벌 수 있다며 기뻐하고 있다. 허씨가 학원에 안 나가는 날에 몰두하는 일은 영화제작일. 언젠가는 프로듀서를 할 꿈을 가지고 영화제작에 참여한다는 그는 “직장생활이 체질에 안 맞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규직 일을 갖게 되면 영화일은 물건너 가는 거죠. 어차피 둘 다 가질 수 없다면, 밥을 굶더라도 좋아하는 일을 택해야죠”라고 말한다.

허씨의 경우는 운 좋은 케이스다. 대부분 입맛에 맞는 일거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는 유아무개(33·경기 안성시)씨는 창작 글을 쓰기 위해 직장을 그만뒀던 케이스. 조직생활에 적응을 못했다기보다는 그게 몸에 배이는 게 싫었다. “비교적 자유로운 직종이랄 수 있는 언론사, 출판사 등에 근무했지만 불합리하고 때로는 더티하기까지한 조직관계, 선후배 위계로 사람의 개성을 내리누르는 분위기 등에 숨이 막혔죠. 그런 관계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상상력을 옭죄죠.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질서에 편입하거나 싸우거나 둘 중 하나인데, 편입하는 건 성격에 맞지 않고 싸우자니 굳이 그렇게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뭐 있겠나 싶었죠.”

직장을 그만둔 뒤 우연인지 단행본 작업 등의 일감이 왕창 쏟아졌다. 92, 93년 무렵에는 한달에 최고 700만원까지 번 일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계를 위해 잡문을 쓴다 해도 글을 쓰는 일인 이상 정신적인 소모가 컸다. 그래서 유씨는 단순 노동을 하고자 맘먹었다. 우연히 가정부 자리를 하나 소개받아, 집주인 면접까지 했다. 먹고 자는 일이 해결되는데다 식구들이 단촐해 낮에는 충분히 자기시간을 낼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집주인 면접에서 유씨는 퇴짜를 맞고 말았다. 대학까지 졸업한 똑똑한 가정부를 둘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도배일도 배워보려 했지만 도배 선생이 키도 작고 뚝심도 없어 보인다며 거부했다. 이래저래 맘 고생을 하던 그는 일정기간 목돈을 모아 창작에만 몰두하겠다는 결심으로 지난 봄 정부출연기관에 계약직으로 취직한 상태. 하지만 계약 기간의 반도 못 채웠는데 벌써부터 몸살이 날 정도다.

취재 도중 만난 프리터들은 전문성이 있건 없건 나름의 소신과 철학이 있었다. 어디 얽매이는 게 싫고 자유롭게 살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부터 번 만큼만 쓴다는 원칙, 나아가 자본주의적 축적과 경쟁질서에서 비켜나겠다는 철학, 게으름과 놀이에 대한 찬양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용기가 필요한 일

유인물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손병욱(30·강남구 논현동)씨는 한달 용돈이 10만원을 넘지 않는다. 유인물을 돌리면 일당 5만원에서 8만원까지 벌 수 있다. 한달에 며칠만 일하고 남는 시간에는 인터넷공간에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 그러다 심심하면 가끔 시민사회단체 집회에도 구경 나간다.

손씨는 “주류 질서를 비판하기는 쉽지만 삶을 짊어지고 그 질서에서 일탈하기는 쉽지 않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라며 자신의 생활철학을 당당하게 밝힌다. “우리 사회가 탄력이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취업을 안 하고 산다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경제적인 문제야 적게 벌어도 적게 쓰면 되지만, 주변의 시선 같은 것이 더 힘들죠. 동시에 그런 시선을 견디는 게 또 훈련이기도 하죠.” 자신의 경우는 형, 동생이 제대로 직장잡아 성공하고 있는데다 어머니도 경제력이 있으니 혼자 쓸 용돈 외에 별달리 돈을 모을 필요를 못 느낀다고 한다. 나중에 자신이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거나 돈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그땐 그 조건에 맞춰 살아갈 용의도 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손씨는 인터넷에서 ‘넌 어때’라는 아이디로 글을 쓴다. 온라인 친구들이 꽤 많다. 8월24일에는 ‘루저’라는 아이디를 쓰는 여자친구에게 집에서 안 듣는 LP판을 한 짐 짊어다 줬다. 자기 집에서 썩느니 그 친구가 잘 듣고 소개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당장의 생계 때문에 직장에 매달리는 분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모두가 가족을 만들고 그들을 부양하는 것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가치를 지닌 사람은 그렇게 살고 아닌 사람은 다르게 살면 좋잖아요. 또 앞날을 대비하는 수단이 꼭 안정적인 직장이나 돈이어야 하나요? 사람을 밑천으로 삼을 수도 있잖아요.”

프리터들은 동일한 의식을 가진 이들과는 연령고하를 막론하고 쉽게 친해진다. 이들이 만나는 공간은 주로 인터넷. 디지탈 세상이 아날로그형 인간인 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프리터로 살아간다는 것은 손씨의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게임 만화를 그리는 지호태씨의 경우 일감이 몰릴 때는 밤세우는 날이 많다. 번역, 디자인, 프로그램 구축 등 전문성을 갖는 일들은 단기간이나마 시간에 얽매여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돈을 떼이거나 늦게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비정규 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고스란히 안고 있는 셈이다. 생활리듬도 잘 조절해야 한다. 외부적인 규율이나 강제, 기준이 없는 탓이다. 프리랜서 작가 유씨는 “한달에 수백만원씩 수입을 올리는 일도 있지만, 어쩔 땐 단돈 100원이 없을 때도 있다”고 말한다. 돈에 대한 관리개념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행복하다. 원하는 방식대로 살며 원하는 일을 맘껏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사 맘껏 할 수는 없다 해도 남의 강요가 아닌 자기 취향에 맞춰 선택한 길이니 후회는 없다. 젊은 프리터들은 무엇보다 세상의 속도에 따르지 않고 자기 속도로 산다는 것은 스릴있고 재미난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소희 기자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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