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시민 14명 모인 합의회의가 두 달 ‘숙의’ 끝 내린 결론…“엄격한 규제 없는 현 상황에서는 절대 안 돼”
▣ 김동광 과학저술가
지난 9월6∼8일 사흘 동안 ‘동물장기 이식에 관한 시민합의회의’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와 이화여대 생명윤리법정책연구소 주최로 열렸다. 두 달 전인 7월에 신문 광고를 보고 자원한 시민들 중에서 보통 사람들의 견해를 대변하기 위해 선발돼 두 달 동안 자기 학습과 전문가 패널들과의 토론을 거친 14명의 시민패널은 본회의 마지막 날인 8일 최종 합의문을 발표했다. 시민들은 동물장기 이식 연구의 필요성은 “대다수가 인정”했지만, “생명연구에 대한 엄격한 규제 장치가 없는 현 상태에서는 동물장기 이식의 인간에 대한 임상시험 및 적용에 대해 절대적으로 반대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또한 시민패널은 “전문가와 시민으로 이루어진 (가칭) 동물장기 이식 연구에 관한 특별위원회와 같은 책임 있는 기구를 구성”할 것, 그리고 “동물보호법과 같은 법규를 조속히 제정해 동물의 권익 보호가 더 철저히 이루어지기”를 정부에 촉구했다.
합의회의, GMO 표시제·생명윤리법 앞당겨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는 1970년대 후반 덴마크에서 처음 실시된 과학기술 시민참여제도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과학기술적 주제에 대한 일종의 시민 법정에 해당한다. 미국의 경우 시민들이 배심원으로 재판정에서 범죄의 유무를 판정하듯, 합의회의는 사회와 생태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고, 윤리나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는 중요한 과학기술적 주제를 놓고 보통 시민들의 다양한 관점을 수렴해서 향후 연구 방향이나 정책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근거로 삼는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지고 최근 생명공학을 중심으로 시민사회와 과학기술의 갈등이 자주 벌어지는 상황에서 시민적 상식으로 과학기술이 사회와 미래세대에 미칠 수 있는 문제점을 사전에 점검하려는 취지인 셈이다. 따라서 합의회의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시민패널이고, 해당 주제에 대해 찬성과 반대 견해를 가진 전문가들은 시민들의 요구에 따라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질문에 답하는 식으로 행사가 진행된다. 합의회의는 여론조사와 달리 연령, 성별, 직업, 소득 등을 고려해 선발한 시민패널들이 수개월에 걸친 예비모임으로 충분한 정보를 얻고 상호 토론과 전문가와의 토론을 거쳐 숙의(熟議)를 통해 결론을 얻도록 설계된 참여제도이다. 따라서 1990년대 이후 유럽, 미국, 일본, 대만 등 많은 나라에서 정책 결정을 위한 근거를 얻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과정으로 널리 채택됐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1998년과 1999년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유전자조작 식품의 윤리와 안전’ ‘생명 복제’를 주제로 합의회의를 열어서 이후 유전자변형식품(GMO) 표시제나 생명윤리법 제정을 앞당기는 데 일조했고, 2004년에는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가 ‘전력정책의 미래에 대한 시민합의’를 열어 당시 핵폐기물 처리장 설치를 둘러싼 갈등에 내재한 원인이던 원자력 에너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그 밖에도 2003년 서울대에서 스마트카드 학생증 도입 문제로 학내에서 합의회의를 연 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번 동물장기 이식 합의회의는 전국적인 규모로 네 번째에 해당한다.
최근 들어 정책 결정에 합의회의, 또는 합의회의 형식을 띤 시민 참여 방식이 우리나라에서도 부분적으로 적용되고 있지만, 합의회의의 진정한 의미는 정책 결정의 보완물이나 절차적 합리성을 위한 장치가 아니다. 합의회의는 한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과학기술 주제의 쟁점들을 시민적 관점에서 도출하고, 그것을 공론화해 사회적 논의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차세대 성장동력, 바이오신약장기사업?
이번 합의회의의 주제인 동물장기 이식은 특히 일반 시민들에게는 낯설고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닌 시민들이 그 문제점을 짚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가족이나 기증자로부터 신장이나 각막을 이식받는 동종(同種)이식과 달리 동물장기 이식은 다른 종에서 장기나 조직 등을 받는 이종(異種)이식이다. 현재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는 동물은 사람과 크기가 비슷한 돼지이다. 그러나 동물의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하는 수준이 되려면 아직은 갈 길이 멀다. 현재는 주로 각막이나 당뇨병 환자를 위한 췌도 이식이 연구되고 있다.
이 분야는 생명공학의 적용으로 경제적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분야로 인식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03년에 차세대 성장동력 10대 분야에 바이오신약장기사업을 선정하고 이번 합의회의를 후원한 바이오 이종장기개발사업단 등 연구조직을 갖춰 본격적인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동물장기 이식의 가장 큰 문제점은 거부반응과 동물장기 이식에 의한 바이러스 감염 등의 안전 문제와 사람이 동물의 장기를 받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동물의 이용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동물의 권리 문제도 중요한 쟁점이다.
선발 이후 자발적인 학습으로 상당한 지식 수준에 도달한 시민패널들은 예비모임부터 전문가들과 대등한 토론을 벌이며 위험, 안전, 윤리 등에 대해 연구자들과는 다른 인식을 보여주었다. 아직 관련 법규나 제도적 장치가 없는 점에 대해 연구자들은 외국 수준의 가이드라인과 연구자들의 자발적 규제로 가능하다는 입장이었지만 시민들은 “이종장기 특별법을 우선 하고 나서 추진하면 좋지 않은가? 외국 이야기를 자꾸 하는데, 우리나라는 법이 있어야 강제가 되지, 자체적으로 잘되고 있다는 이야기만 하니까 답답하다”라는 응답을 했다. 이것은 특히 황우석 사태 이후 정부와 연구자들의 자체 규제에 대해 강한 불신이 형성됐음을 보여준다.
또한 관계자들이 날로 심화되는 장기이식 대기자 적체 현상을 근거로 이종이식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하자 시민패널은 “그것만으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로 인한 재앙은 왜 언급하지 않는가. 장기가 필요한 사람들은 절실하겠지만, 장기이식으로 인한 전염성 질병 등으로 인해 사회 안전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시민패널은 사회 전체의 관점을 중시했고, 제도적 규율 장치 없이 연구가 진행되는 상황을 보고 앞으로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초청에 응하지 않은 정부 부서
또한 시민패널은 동물장기 이식으로 인한 정체성 문제에 상당한 비중을 두었다. “이종이식이 계속된다면 어디까지가 인간인가?” “생명이 먼저인가, 정체성이 먼저인가?” 등의 문제 제기는 이종이식이 인간의 본질에 맞닿아 있는 주제임을 보여주었다. 그 밖에도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 “질병의 원인이 개인적인가, 사회적인 것인가? 이종이식 연구처럼 많은 비용을 들여서 질병에 대한 대응을 할 필요가 있는가?” “이종이식 연구로 수명이 늘어난다면 고령화 사회로 인한 경제적 부담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등 우리가 앞으로 둘러메고 가야 할 중요한 쟁점들을 제기해주었다.
쏟아지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조정위원회(위원장 맹광호 가톨릭 의대 교수)는 수의학, 의학, 생물, 철학, 윤리, 사회, 동물권 등 수많은 분야의 전문가 패널들과 장기이식 환자와 같은 이해당사자까지 토론의 장으로 불러들였다. 이번 합의회의는 동물장기 이식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벌어진 한바탕 토론과 학습의 장이었다.
그러나 이번 합의회의는 언론과 사회로부터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미 합의회의가 여러 차례 열렸고, 주제도 과거와 달리 전문적이었고, 한정된 예산으로 인한 홍보의 한계도 있었지만, 모처럼 마련된 훌륭한 소통의 장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지 못한 점은 앞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로 지적됐다. 또한 시민패널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관련 부서에서 이번 행사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시민의식은 높아가는데 정부와 관련 정책 담당자들은 그에 따르지 못하는 셈이다. 합의문에서 지적했듯이 정부와 사업단은 시민패널들이 많은 시간을 들여 얻어낸 소중한 결과가 사회적 논의의 시발점이 되고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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