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갈등, 패러다임의 전환 없인 해결 못해
자연과 인간의 불평등을 허무는 생태적 진보를 어떻게 이룰까
▣ 김동광 과학저술가·고려대 강사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최근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갈등의 상당 부분은 개발과 연관된 것들이다.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들이 최근 대법원 판결로 물막이공사가 재개된 새만금 사태, 지율 스님의 단식이 여러 차례 이어졌던 천성산 사태 그리고 주민투표를 통해 후보지가 확정됐지만 아직도 많은 불씨를 안고 있는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논쟁 등이다. 이러한 논쟁들이 온갖 갈등 해결 기법들을 동원하고 때로는 물리적 폭력이나 금권까지 동원해서도 쉽게 해결되지 않고 표면적으로 잠잠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꺼졌다가 되살아나는 산불처럼 다시 점화되기 쉬운 이유는 단순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에 그치지 않고 그 밑에 근원적 가치 충돌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기존 진보도 인간중심적 한계
최근에는 단순히 소수 환경론자들과 다수의 개발론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다가 일방적으로 후자의 승리로 끝나는 해묵은 관행으로 치부할 수 없는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이러한 갈등이 오늘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지향해야 할 가치를 둘러싸고 도처에서 빚어지고 있으며, 더 이상 생태적 관점이 소수의 관념적인 주장이나 현실을 도외시한 배부른 소리로 간주될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개발·발전 산업화 등의 가치들이 한계에 봉착했고, 이 과정에서 파생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민주·분배·평등등과 같은 가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했던 이른바 ‘전통적인 진보’ 역시 크나큰 장애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생태적 위기’에 대한 적극적 인식을 요구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환경 담론과 녹색 토론의 광장 구실을 해왔던 잡지인 <환경과 생명> 2006년 봄호에 실린 “양극화를 넘어 ‘생태적 탈근대화’로”라는 글에서 조명래 교수는 한국 사회의 발전이 더 이상 진정한 의미에서 진보를 담보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시장경제의 확장은 분배 정의를 수반하지 못하고, 시민사회 성장은 공동체적 시민성을 배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이것을 산업적 근대화의 한계이자 물질 욕망에 대한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중심적 발전 방식의 한계로 보았다. 그동안 진보를 떠받쳐온 핵심적 가치인 “민주, 성장, 분배, 평등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규율하는 규범에 불과하고 그 실현이 물질 생산의 극대화를 필연적으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산업화와 인간중심적 발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회적 선택구조를 바꿔라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전통적인 시장 경쟁에 따른 사람 사이의 불평등(사회적 불평등)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 중심주의가 극복되지 못하면서 야기된 사람과 자연 사이의 불평등(생태적 불평등)까지 더해져 이중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위기를 포괄적인 생태 위기로 보는 관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전통적인 진보 담론은 제한적일뿐더러 근본적으로 산업적 근대화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추구 과정에서 근대화의 패러다임을 우회적으로 강화하고 자연과 인간의 벽을 더욱 두껍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진보의 정의를 확장해 지금까지의 인간을 중심으로 한 진보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자연과 생태계를 포괄하는 ‘생태적 진보’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생태적 진보, 또는 녹색 진보라는 개념은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진보를 단순히 늘리는 식으로 획득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사실상 그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며, 지금까지 우리의 삶이 그 위에서 이루어진 토대이자 우리의 사고방식을 규정해온 뿌리인 근대주의(modernism)에 대한 총체적 반성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이 종교적 개종에 비유했던 패러다임 전환만큼이나 근본적인 변화이다. 한편으로는 인간에게만 허용했던 많은 특권적 인식들을 버려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지금까지 자원 또는 개발, 통제, 조작의 대상으로 간주했던 ‘비인간’들에게 생태계라는 복잡하고 풍요로운 시스템 속에서 (최소한) 인간과 동등한 위치를 가지며 상호작용하는 행위자의 지위를 부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우리 사회가 즉각적으로 수용하기 힘들다. 따라서 여러 학자들은 생태적 관점을 도입하는 실현 가능한 방식들에 대한 담론을 제공하고 있다.
생태 정치를 주장하는 학자로 잘 알려진 존 드라이젝은 생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공동체적 노력으로 ‘사회적 선택’과 ‘선택구조’를 강조한다. 근대 자유주의에서는 사회적 선택이 단순히 개인적 선호의 집합 정도로 간주되지만, 드라이젝은 개인적 선호를 뛰어넘는 공공성 추구로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또한 정부나 시장과 같은 기존 사회 제도들은 생태 위기를 해결하기보다는 다른 형태로 전가하거나 변형시키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생태적 건강성과 같은 기존 가치와 다른 지향점을 추구하는 노력은 다른 사회적 선택구조를 세우려는 노력을 수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기존 사회구조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해준다.
또한 드라이젝은 합리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생태적 합리성’이라는 개념을 제기한다. 그것은 근대주의의 기계적·계산적·환원적 합리성과는 달리 복잡성, 불확실성, 환원불가능성과 같은 생태계가 가지는 근본 특성들을 합리성 개념 속으로 도입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과 사회를 결합시켜 생태적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이러한 개념은 심층 생태학(deep ecology)처럼 강한 근본주의적 입장에 비하면 아직도 인간을 중심에 놓는 절충적인 접근 방식이라 할 수 있지만, 생태적 합리성은 관념적 과격성이 아닌 실현 가능한 생태주의를 위한 중요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생태적 상상력을 새만금에서
이러한 담론들이 활발하게 제기되는 것은 단지 생태주의의 유행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의 심각성에 비추어 기존의 제도나 접근 방식들이 전혀 대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데서 비롯된 위기의식의 발로이다. 드라이젝의 개념을 빌리자면 천성산과 새만금 사태, 그리고 핵폐기물 처리장을 둘러싼 사태가 극한적인 벼랑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잘못된 사회적 선택구조의 문제이다. 결국 최근 수년 동안 연속된 이러한 사태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에게 닥친 총체적 ‘생태 위기’의 다른 표현들, 즉 동전의 앞뒷면일 뿐이다.
도종환 시인은 온라인 매체 <프레시안>의 새만금 살리기 시(詩) 릴레이에 실은 ‘갯벌’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백 몇십개의 산을 까뭉개/ 살아숨쉬는 갯벌과 바다를 생매장하는 인간들의 교만하고 어리석은 몸짓을/ 파도와 게와 달과 산맥과 지구의 실핏줄들이/ 부들부들 떨면서 지켜보고 있다/ 인간이, 인간이 이래도 되는 것일까/ 탄식의 물소리들이 밀려오다가 또 쓰러진다.” 시인은 우리 시대가 회복해야 할 생태적 상상력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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