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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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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파의 역사학

등록 2000-11-09 00:00 수정 2020-05-03 04:21

신파란 무엇일까? 신파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단 멜로드라마를 말해야 한다. 멜로드라마란 음악(멜로)과 드라마(연극)가 결합된 장르란 뜻이다. 18세기 신고전주의시대에 출현한 멜로드라마의 첫 번째 특징은 작중인물이 고정된 성격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주인공, 여주인공, 희극적 인물, 악당 이 넷이 주축이 된다. 선인이 중간에 악인이 된다든가 악당이 착해지는 식으로 성격이 바뀌는 일은 없다. 두 번째 특징은 권선징악의 도덕적 정의가 극 안에서 엄수된다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악인에 의해 부당한 시련을 겪게 되고, 따라서 보는 이는 악인에 대한 격렬한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신파는 멜로드라마와 어떻게 다른가. 신파에 관해 논문을 쓴 문화평론가 강영희씨에 따르면, 멜로드라마가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일본에 유입되어 만들어진 것이 신파를 이루었다고 한다. 신파가 가장 번창한 것은 1897년에서 1912년 사이다. 신파(新派)라는 이름이 의미하듯이, 신파는 당시 연극계의 새로운 흐름이었다. 이때 대응되는 구파(舊派)는 바로 가부키(歌舞伎)다. 재미있는 것은 신파의 기원이 바로 정치극이었다는 것이다. 신파의 다른 이름은 장사지거(壯士芝居), 서생지거(書生芝居)라 불렸는데, 장사 혹은 서생이란 당시 자유민권론을 주장하던 반정부 야당계 청년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정치선동을 위해 시작한 연극이니만큼 액션이 과장되고, 대사가 과장되고, 상황이 과장스러운 세 가지 과장이 특징이었다. 신파에서 정치적 색채가 옅어지면서 멜로드라마적인 요소가 짙어지게 되었다. 즉 신파는 ‘눈물로 운명을 견뎌야 하는 여성의 자아와 의지의 표현’을 만드는 비극에 초점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뒤에 일본적 신파의 전통은 구로사와 아키라, 오스 야스지오와 함께 일본영화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미조구치 겐지로 이어진다. 한국에는 1912년 임성구가 남대문 밖 어성좌에서 을 공연하면서 신파극이 알려졌는데, 한국에 들어올 때 신파는 처음의 정치적 색채가 완전히 빠지고 과장된 연기와 상황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북한의 나 등을 보면 신파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북한의 같은 경우는 초기 신파의 정치적 요소가 탈색되지 않은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일제치하의 암울한 상황과 민중의 억압된 정서가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파와 딱 맞아떨어져, 기층민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이때 신파물은 통속적인 윤리관을 옹호하면서도 그에 의해서 희생당하는 인물을 그렸다. 이는 격변하는 한국사회에서 갈등하는 기층민중을 간접적으로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에서 홍도는 전통적인 가치관에 따라 오빠를 위해 자기 운명을 희생하지만 실제로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쇠고랑뿐이다. 즉 신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불합리한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과, 그 상황에 의해 불행해지는 주인공이 필요하다. 이때부터 ‘신파조’라는 말은 통속적인 윤리관에 기반을 두면서 과장된 연기, 대사, 도식적인 상황이 나오는 창작물을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현대로 오면서 신파극은 가끔씩 공연되기는 하지만 하나의 온존한 장르로 번성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텔레비젼과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를 맞아 이곳저곳에 ‘신파적’인 색채를 뿌린 것은 사실이다. 특히 부터 시작한 영화에서 신파적 요소는 두드러졌다. 60년대 , 70년대 같은 작품에 이르기까지 신파의 흔적은 다양하게 출현한다. 이 과정에서 불치병이라든지 여주인공이 술집에 나간다든지 하는 디테일이 덧붙여지면서 관객을 즐겁게 해주는 클리셰들이 강화되었다. 드라마에 있어서도 고달픈 시집살이와 바보 남편을 견디어내는 여인상을 그려낸 , 시한부 인생으로 삶을 정리하는 중년여인을 그린 등 신파적 요소는 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었다. 90년대 들어와 각광받은 김수현식 드라마에서는 특히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여자와 부잣집 남자와의 결혼, 이에 의해 생기는 여자의 고통 묘사가 단골소재로 쓰이는데, 이 또한 신파의 주요 소재와 맥락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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