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개발 관련 북-미 대타협 기회로 삼아… 수렁의 부시 구해주고 안전보장 약속 꾀해
“지금은 북한이 나쁜 행동을 하기에는 절호의 시기다. 북한이 핵무기 보유를 선언해도 부시 정부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로버트 두자릭 미국 워싱턴 소재 허드슨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은 최근 부시 행정부 내부 기류를 전하면서 북한이 더 강공을 둘 가능성을 점쳤다. 그는 북한 지도부가 이라크 전쟁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부시 행정부의 처지를 그냥 지켜만 볼 리 만무하다고 지적했다. 지금이 대미 협상력을 높일 수 있는 적기라는 것이다. “북한이 어느 선까지 발언 수위를 높일지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일부 낙관적 견해가 있긴 하나, 북한은 자신들의 견해가 계속해서 제대로 관철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지금까지와 달리 수사적 차원을 넘어서 실제 더 강경한 행동을 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하지만 그는 북한이 구체적으로 어떤 강경 조처를 내보일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원치 않았다.
6자회담 성과 없자 핵무기 생산설 흘려
북한은 10월2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8천여개의 폐연료봉에서 추출된 플루토늄을 핵 억제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용도 변경했다고 밝힌 데 이어 3일에는 영변의 재처리시설인 방사화학실험실을 필요한 시기에 재가동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놓았다고 밝혔다. 핵무기 생산이 임박했음을 예고한 셈이다. 특히 북한은 ‘평화적 핵시설’들이 정상 운영되고 있다면서 “영변의 5MW 원자로에서 계속 나오게 될 폐연료봉들도 때가 되면 지체 없이 재처리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핵무기 몇개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과 다른 5MW 원자로에서 앞으로 나올 폐연료봉도 재처리해 플루토늄을 계속 생산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더구나 지난 1994년 제네바 합의에 따라 건설이 중단됐던 영변의 50MW 원자로 공사를 재개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6자회담 대화 기조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보이는 북한의 이런 태도는 상당히 이례적이고 도발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이전까지 북한은 적어도 대화와 협상이 진행되는 국면에서는 추가 위협행위를 자제했다. 물론 북한이 첫 6자회담이 끝난 뒤 미국의 태도 불변을 문제 삼으며 ‘6자회담 무용론’을 펼치기는 했다. 하지만 북한도 기본적으로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을 원한다는 점에서 최근의 핵개발 위협 수위를 한껏 높이는 행동은 주목할 만하다.
흥미로운 대목은 북한은 분명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두자릭 연구원의 지적대로 미국이 제동을 걸 수 있는 수단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부시 행정부 인사들은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되 상황을 악화시킬 경우 물리적 수단을 쓸 수도 있음을 공공연히 내비쳐왔다. 하지만 이런 강경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다. 미 정부 관계자들의 위축된 태도는 이런저런 공식, 비공식 반응에서도 충분히 읽히는 대목이다.
부시 행정부 인사들은 기본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북한의 핵개발 위협을 평가절하하기에 바쁘다. 그 흔한 경고 발언도 나오지 않는다. 이라크 사태만 없다면 북한의 작은 위협을 오히려 크게 부풀려 공격의 빌미로 삼을 부시 정권이었다. 대표적인 대북 강경파인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도 얼마 전 북한의 핵개발 위협 발언과 관련해 “북한의 최근 발언 내용은 잘 모르지만 북한 핵문제는 외교적 해결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해 북한과 정면대응을 피하려는 의도를 잘 보여줬다. 최근 이라크 사태는 부시 행정부 내 매파들에게는 자신들의 정치적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뇌관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을 주도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나 울포위츠 부장관은 정치권이나 여론으로부터 지속적인 사임 압력을 받고 있다. 이들은 대북 강경여론을 주도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의 국내 정치적 위상 추락도 대북정책의 연성화에 기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북한과의 충돌 회피 전략 절실
미 의회나 언론에서는 점차 이라크 점령 기간의 장기화, 인적 손실과 비용 급증 등의 요인이 베트남전과 유사한 점이 많다며 베트남 전쟁의 악몽을 되살리고 있다. 여기에다 내년 대선이 13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정쟁까지 겹쳐 부시 행정부로서는 9·11 테러 이후 최대 난관에 봉착한 꼴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행정부 내에서는 북한과의 극한 대립이 불러올 또 다른 혼선을 우려해 충돌을 피하려는 목소리가 높다고 한국의 외교부 관계자는 귀띔했다. 북한과의 또 다른 전선 형성은 이제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는 게 최근 워싱턴을 다녀온 관계자의 평가다. 최근 크게 누그러진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태도도 이런 내부 사정을 반영한다.
문제는 미국이 북한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하면서도 협상전략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6자회담 계속 추진의사를 밝히는 정도다. 핵문제 해결의 관건인 북한의 안보우려 해소를 위한 구체적 방안 마련에 여전히 소극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9월29일부터 이틀간 도쿄에서 열린 한·미·일 3국의 북핵 실무협의회 직후 외무성 대변인의 ‘8천개 폐연료봉 재처리 완료’ 담화가 나오고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 중인 최수헌 외무성 부상이 10월2일 이례적으로
물론 북한이 지금까지의 ‘핵 억제력 보유’라는 모호한 표현에서 ‘핵 실험 혹은 보유 선언’이라는 더 분명한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던지거나, 핵 보유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면 북한도 안전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는 부시 행정부 매파들에게 이라크에서 추락한 신뢰를 북한에서 되찾을 수 있는 결정적 명분을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와는 별개로 북한의 명백한 대량살상무기 위협이 부각돼 국제사회의 목표물로 인식되면, 미국은 이라크보다 용이하게 공격 명분을 확보하고 위상회복을 꾀할 수 있다. 북한도 이런 사정을 잘 아는 듯하다. 최수헌 외무성 부상이 10월 초 뉴욕에서 이례적으로 기자들을 만나 “핵은 어디까지나 자위적 수단이며 핵무기 수출 계획은 없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점이 이를 반영한다. 그는 10월2일
“이라크 파병 결정은 미국에 달려 있다”
한국 정부는 지금이 북-미 대타협의 적기라도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양쪽의 극단적 대치는 모두에게 득이 되지 않고 심지어 파멸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켜, 부시 행정부에는 북한의 안보우려 사항에 대한 더욱 진전되고 구체적인 해결방안의 제시를 촉구하고, 북한에는 더 이상의 추가 상황악화를 막으려는 필사적 외교전을 펼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청와대 브리핑에서 “파병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 한반도 안보상황, 특히 북핵 문제의 진전은 근본적 고려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라크 파병 문제는 이런 맥락에서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기도 하지만 미국의 대한반도 안전보장 약속을 재확인받을 수 있는 기회로 인식되고 있다. 어쩌면 한국 정부의 파병 조기 결정 여부는 미국의 태도에 달려 있는지 모른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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