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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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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인형이 좋다”

등록 2003-04-25 00:00 수정 2020-05-03 04:23

유년의 향수를 간직하고 인형놀이하는 어른들… 고가의 한정본을 장만한 기쁨을 그 누가 알까

‘잘못 들어왔나’ 만화웹진 ‘악진’(www.akzine.com) 사무실에 들어서다 잠깐 멈칫했다. 벽면 한쪽을 차지한 책장엔 인형이 가득하다. 사무실인지 전시장인지 헷갈릴 정도다. “저쪽은 편집장님 인형들이고 이쪽은 제 거예요.” 악진 편집실장 허정숙(29)씨는 화이트칠판이 놓인 쪽을 자랑스럽게 가리켰다. 인형사진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칠판은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다분히 ‘의도된 이벤트’임을 알려준다. ‘전시 이름:청춘전, 전시공간:대안공간 백보드, 기간:5월10일까지.’ 블라이스 인형 마니아인 허 실장이 꾸민 일이다. 그 아래 탁자엔 7개의 블라이스 인형이 농구복을 입고, 기타를 메고, 털모자를 쓴 채 새침한 표정으로 서 있다. 빼빼 마른 몸매에 커다란 머리의 극단적인 가분수 체형, 왕방울만한 눈이 톡 치면 굴러떨어질 것만 같다. 특히 머리 뒤에 있는 끈을 잡아당길 때마다 주황·분홍·초록·파랑으로 색깔이 변하는 매혹적인 눈동자에선 눈을 떼기 어렵다. “인형은 절대로 늙지 않지요. 청춘의 예쁜 모습들을 보여준다는 뜻으로 전시제목도 ‘청춘전’이라 붙였어요.”

27년 만에 화려하게 부활한 블라이스

허씨가 ‘키우는’ 블라이스 인형은 1972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당시엔 별 인기를 못 얻고 사라지는가 했다가 1990년대 들어 사진작가 지나 개런의 카메라를 통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다양한 옷과 소품으로 치장한 귀여운 인형사진은 인터넷을 타고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일본의 완구회사 다카라는 이를 발빠르게 포착해 블라이스를 재탄생시켰다.

지난해 봄 첫 만남 뒤로 블라이스 인형에 푹 빠져 살던 허 실장은 “처음엔 8만원이 넘는 인형들을 사느라 카드를 긁어댔다”고 고백한다. 맨 처음 제작된 복각본 1호 ‘몬드리안’ 같은 것은 구하기도 힘들고 가격도 프리미엄이 붙어 10만원을 훌쩍 넘기기 일쑤다. “요즘엔 절제하느라 한달에 한번씩 기분내는 심정으로 소품들을 사요. 월급받은 날, 아이들 외식시키는 엄마의 기분이랄까.” 그는 “블라이스동호회 활동을 시작하던 초창기엔 우리 애들 패션이 남보다 뒤져보일까봐, 내가 센스가 없다는 평을 들을까봐 걱정했다”고도 말한다. “이제는 별로 신경 안 써요. 회원들끼리 인형 들고 우르르 모여서 야외촬영하는 게 신나요. 서로 관심사도 비슷해 이야기도 잘 통하고요. 혼자 밖에서 인형 들고 야외촬영하려면 괜히 쑥쓰러웠거든요.”

허 실장이 어른이 돼서 인형놀이를 다시 시작한 것은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20대 초반 길거리를 지나다 광주리에 한 가득 2개에 1천원씩 파는 마론 인형을 보고선 눈이 확 뒤집혔어요.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거랑 똑같더라고요.” 그 뒤 인형을 하나둘씩 모아온 그는 “인형만 보고도 주인을 알아맞힐 정도로 인형은 주인을 많이 닮아요. 인형을 꾸밀 때는 나를 표현하는 기분이 들죠”라고 말했다.

허 실장이 주로 빗질 하고 옷 갈아입히면서 인형놀이를 한다면, 그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강성수 편집장은 다른 인형 취미를 갖고 있다. 강 편집장에게 인형은 ‘시각적 선물’이다. “요즘엔 만화 캐릭터 주인공들을 주로 모아요. 종이로 보던 주인공들이 입체로 살아나온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가 특히 아끼는 인형은 일본만화 에 나오는 공포 캐릭터 ‘노부오’, 의 주인공 ‘쿠로’와 ‘시로’, 1950년대 흑백영화에서 춤추던 초창기 미키마우스 복각인형 같은 것들이다. “인형 모으기는 골치 아픈 일이죠. 수십개의 온라인 매장을 뒤지며 인형을 고르고, 가격을 비교하며 사야 하니까. 그래도 이렇게 진열장에 한 가득 인형을 쌓아둔 것은 어쩔 수 없는 ‘향수’ 때문인 것 같아요.”

“인형을 꾸밀 때 내가 깨어난다”

그러나 인형 취미가 꼭 유년의 그리움 때문만은 아니다. 바비 인형과 노는 30살 남자는 어떤가. “어렸을 때는 탱크나 총 갖고 놀았어요. 어느 날 여자친구와 바비 인형 카페에 갔다가 군복 입은 흑인 바비를 보고는 한눈에 반해버렸어요. 실제 바비를 갖게 됐을 때는 너무 만족스러웠죠.” 이홍기(만화가)씨는 바비를 ‘한 포기 난’에 비유할 정도다. “회사일로 스트레스받다가도 바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완벽한 ‘그녀’를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이씨는 아예 포장을 뜯지 않는다. “주로 1950~60년대에 나온 바비(이처럼 오래된 것들은 빈티지 바비라고 한다)를 다시 복각해 만든 것(이런 것들은 빈티지 리프로라고 한다)을 모아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1960년대 복각품인 흑발의 TNT브루넷인데, 오밀조밀하고 귀여운 얼굴이 참 맘에 들어요.” 나직한 목소리로 바비에 대한 사랑을 늘어놓지만 그 역시 바비를 좋아한다고 하면 ‘변태’처럼 보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한다. “아버지가 아시면 호적 파가라고 하실 거예요(웃음). 또 ‘저놈 정상일까’ 하는 눈길이 부담스러워서 오프라인 매장은 잘 안 가요.” 그는 자기 만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도 바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가장 좋은 디자인이란 단순하면서도 최소화한 몇개의 선으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거죠. 바비의 균형잡힌 단아한 몸매선도 그래요.”

어른의 인형놀이는 금전적 출혈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관절을 움직이며 자연스러운 동선을 만들 수 있는 액션 피규어 인형은 처음에는 2만원대에서 팔리다가 시간이 지나 희귀본이 되면 10만원을 넘기는 것이 예사다. 피규어 인형 회사들이 특정 시즌에 선보인 제품들은 철이 지나면 더 이상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나왔을 때 처음에 세트로 사두지 않으면 나중에 사고 싶을 땐 몇배의 돈을 물어야 한다. 그래서 수집가들은 “처음부터 다 사두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말할 정도다. 가격으로 보자면 피규어 인형은 ‘저렴한’ 수준이다. 목·어깨·팔꿈치·무릎 같은 관절이 공처럼 둥글게 돼 있어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할 수 있는 ‘구체관절 인형’은 일본 보크스사에서 만드는 ‘돌피’가 가장 유명한데, 이 인형들은 최소한 40만원, 한정본은 100만원대까지 나간다. 무심한 듯, 슬픈 듯 커다란 눈과 조그만 코·입이 아무리 귀엽다 해도 이쯤에선 사치스러운 취미인 건 분명하다.

고가의 취미생활… 100만원대도 수두룩

인형을 산 뒤에도 해줄 일이 너무 많다. 새로운 의상과 가발도 사야 하고, 눈알·신발·속눈썹까지 분위기를 변신할 수 있는 다양한 액세서리도 갖춰야 한다. 마니아들은 전용물감을 사용해 얼굴을 화장해주고, 직접 머리카락을 심는다. 이 가격도 만만치 않다. 모자 하나, 실크속옷 한벌이 2만원에 달해 사람 옷값과 맞먹을 정도다. 19세기 프랑스에서 태어난 비스크는 인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예술작품이다. 점토를 거푸집에 부어 구워내는 이 인형은 틀에 박힌 표정 대신 생각에 골똘히 잠긴 것 같은 섬세한 표정까지 연출이 가능하다. 비스크는 골동품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수백만원대에 이르는 것도 있다. 실리콘 재질에 사람과 비슷한 체구로 만들어 야릇한 성적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리얼돌’도 100만원 이상이며, 마니아들 사이에선 아예 ‘어른용’으로 여긴다.

하지만 인형 수집가들은 이처럼 인형에 돈을 쏟아붓는 것을 나쁘게만 보지 말라고 주장한다. 서울 홍익대 근처에서 피규어 인형숍 좀비(www.zombi.co.kr)를 운영하는 윤두병씨는 “술값 내는 건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왜 인형 사는 건 이상하게 보느냐”고 반문한다. “인형이라고 무시하지 말라”며 그가 소개한 인형은 국내 유일의 피규어회사인 ‘자오’에서 만든 삼국지 시리즈다. “관우가 들고 있는 청룡언월도는 실제 쇠와 나무로 만든 아주 질 좋은 것입니다. 관우 옷엔 철심을 박아 바람이 불 때 옷자락이 나부끼는 표현까지 가능하죠. 손작업으로만 가능한 이 인형들에는 만든 사람의 열정이 담겨 있어요.”

인형을 이처럼 이해한다면 ‘작가주의 인형’도 가능할 터. 홍콩의 3대 인형 디자이너로 불리는 마이클 라우, 에릭 소우, 제이슨 슈는 독창적인 자기 스타일을 완성한 작가들이다. 윤씨는 “홍콩·일본 등지에서 토이쇼가 열리면 이 인형들을 살 수 있는 권한을 얻기 위해 줄을 서서 추첨을 받아야 할 정도”라고 말한다. 대담한 선으로 표현하는 단순미, 만화적인 과장성으로 가득 찬 홍콩 피규어는 힙합·보드에 열광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인형을 즐기는 어른들에겐 ‘오타쿠’(집에 틀어박혀 게임·프라모델 조립 같은 특정 취미에만 몰두하는 비사회적 인간을 가리키는 말)라는 혐의도 따라붙는다. 올해부터 피규어 수집에서 건담으로 관심을 튼 웹디자이너 김연수(26)씨는 “오타쿠로 보지 말라”는 말로 경계심을 표현했다. 그는 퇴근 뒤엔 매일 1시간가량 건담을 조립한다. 심지어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때조차 몰래 병원을 빠져나와 건담을 만들었을 정도다. “압구정동에서 친구들과 술 마신다고 해서 사회적인 건가요 전 술 대신 건담을 택했을 뿐이에요. 어렸을 때 아카데미사에서 만든 ‘칸담’이란 ‘짝퉁 모델’이 나왔죠. ‘칸담’으로도 너무 즐거웠던 당시엔 ‘어른이 되면 이런 걸 100개를 사다 만들겠다’고 다짐했어요. 어른이 돼서 꿈을 실현한 거죠.” 김씨는 부품을 단순히 끼워맞춰 조립하는 것을 넘어 부품조각을 일일이 깎고 다듬고 색칠하는 ‘거라지-키트’에 빠져 있다. 줄로 다듬고 톱으로 자르고 디자인 나이프로 깎아 플라스틱 표면을 매끈매끈하게 정리하는 데만도 2주일 넘게 걸린다. 거기에 모형용 에나멜로 색칠하고, 손드릴로 구멍을 뚫고 철심을 박아 관절을 연결하는 것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공이 드는 일이다. 김씨는 이처럼 노고를 쏟아부어 만든 건담을 보면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고 말한다.

인형과 함께라면 일상이 풍요롭다

의 지은이인 에티엔 바랄은 유년기의 향수 속에서 게임·만화·인형의 세계로 도피하는 일본의 젊은이들을 두고 “누에고치처럼 스스로 자아낸 가상세계에 대한 선호는 일본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겪는 어려움을 표징한다”고 분석한다. 인형에 둘러싸여 행복한 미소를 짓는 한국의 어른들 역시 사회에 적응하는 어려움을 인형에 대한 애착으로 돌리는 것일까. 아마 환상이 필요 없는 현실세계는 어느 시대에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한 점은 이들이야말로 “21세기는 유희적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으리라”라는 예언을 실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글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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