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여름 진평강 하류, 다슬기로 뒤덮인 채 엉킨 두 남녀의 시신이 발견된다. 남자는 진평소방서 소방관 ‘도담 아빠’, 여자는 서울에서 진평으로 이사 온 미용사 ‘해솔 엄마’. 좁은 동네엔 ‘불륜’ 혹은 ‘치정’이란 단어가 돌고, 고등학생인 소녀 도담·소년 해솔은 ‘급류’ 속에 남겨진다.
정대건 작가의 새 장편소설 <급류>(민음사 펴냄)의 첫 장면이다. 강렬한 이미지의 도입부, 시간을 뛰어넘어 전개되는 신(scene)들은 작가의 이력을 짐작게 한다. 정 작가는 소설가 이전에 감독이었다. 대학 시절 카메라 한 대를 사서 만든 자전적 다큐멘터리 <투 올드 힙합 키드>(2012)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우수작품상·관객상을 받았다. 함께 ‘힙합 키드’를 자처했던 어린 시절 친구들이 10년 뒤 어떻게 사는지 좇으면서, 감독 자신의 내면을 파고든 작품이다. 이후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가 단편영화 <사브라>(2014)를 만들었고 장편영화 <메이트>(2019)로 바르샤바국제영화제 특별언급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감독’ 대신 ‘작가’로 자신을 불러달라고 했다.
“너무 긴 시간과 비싼 값을 치르고 나서야 저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거죠. 범생이라고 해야 하나. 열심히 하는 건 자신 있는데, 영화감독은 결국 선장 노릇이잖아요. 많은 사람과 협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래서 정말 혼자, 오로지 혼자 할 수 있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은 것 같아요.” 2023년 1월10일 서울 마포구의 한 식당에서 만난 정대건 작가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차분하게 웃었다.
“(힙합을 할 때도) 제가 그들 안에 속했다는 소속감보다는 오히려 다큐를 찍는 것 같았어요. 관찰자의 시선으로 본 거예요. 근데 그게 영화 할 때도 똑같았어요. 영화학교 친구들은 중앙대 영화학과나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다니면서 단편영화도 찍고 크루도 있었는데, 전 그런 게 없고 이방인 같았어요.”
‘이방인’은 어떤 형태로든 ‘이야기꾼’의 길을 이어가기로 했다. 2020년 첫 장편소설 (은행나무 펴냄)이 한경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했다. 2030세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추천 책으로 꽤 오르내렸다.
‘내가 아무 비용이 들지 않는 인간이면 좋겠다.’ ‘은행원들이 모이면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예술가들은 돈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은 우리에게도 적용됐다.’ ‘내가 사랑하는 걸 미워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걸 더욱 사랑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
젊은 날 유명 영화 조감독이었다가 중년의 택시기사가 된 ‘GV 빌런’(감독과 관객의 대화 시간에 이상하고 무례한 질문으로 분위기를 흐리는 관객) 고태경, 그런 그를 따라다니며 다큐를 찍는 젊은 감독 조혜나는 ‘꿈을 이루지 못한, 취업하지 못한, 평생직장이 없는’ 세대의 마음을 흔들었다.
2021년 낸 소설집 <아이 틴더 유>(자음과모음 펴냄)도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곤 할 수 없다. 작가 자신의 경험과 감정이 녹아 있는, ‘유예된 삶을 사는 청춘 이야기’에 가까웠다. 데이팅앱으로 시작된 두 남녀의 일상과 연애는 ‘가볍고도 무거운’ 요즘 사랑에 대한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2년여간 쓴 신간 <급류>는 결이 좀 다르다.
“자전적 이야기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어요. 은 자존감이 낮아진 조혜나란 젊은 감독이 고태경을 만나 다큐를 찍는 과정에서 자기가 실패했다고 느낀 인물이 사실 그렇지 않다는, ‘한 번의 실패’가 ‘완전한 실패’가 아님을 배우는 여정이잖아요. 어떤 드라마적 플롯이 있는데 <급류>는 그런 지도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일단 도담이 자신을 망가뜨리려 하자 그 일을 도와줄 사람들은 넘쳐났다. 상처 입은 사람의 냄새는 애써 덮고 감추어도 눈빛에서, 걸음걸이에서,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도담이 외롭다는 것을 감지하고 남자들은 어디선가 나타나 접근했다. 시체를 뜯어 먹으려고 강바닥에 숨어 있다 모여드는 다슬기처럼.
젊음으로 가득한 캠퍼스에서 해솔은 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했고 이미 아주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죽음을 망각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구는 게 젊은이들의 특권이라면 해솔은 젊음을 잃어버렸다.
작가는 <급류>에서 소용돌이에 휘말린 도담·해솔의 헤진 상처를 조명한다. 만들어낸 인물들이지만 불행으로 몰아넣은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꼈다”는 작가는, 이들이 상처에서 빠져나와 ‘헤엄치는 법’을 익혀가도록 이야기를 썼다.
“영화학교에서 이주승 배우와 <사브라>란 단편영화를 찍었어요. (당시 인터넷에) 학교폭력을 당한 학생이 엘리베이터에서 우는 사진이 있었는데, 그때 ‘소년의 손을 잡아주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했거든요. 그런데 (영화를) 만들면서 ‘비극으로 끝나면 관객 입장에서 메시지가 역설적으로 받아들여지겠지’ 하면서 비극으로 끝냈어요. 해외 영화제도 가고 성과는 나쁘지 않았는데, 몇 년 동안 사진 속 주인공에게 미안했어요. 손잡아주고 싶어 출발한 작품이 왜 비극으로 끝났을까, 앞으로 그러지 말아야겠다 (생각했어요).”
이야기는 허구지만, 그가 실제 보고 겪은 것들이 이번 소설에도 녹아들었다. 정 작가는 경기도 가평에서 2년간 의무소방원(소방서에서 군복무를 대체하는 보조인력)으로 일했다.
“물에 대한 이미지가 자리잡았던 것 같아요. 물을 흔히 ‘생명의 원천’이라 하는데, 사실 사람들은 물 안에서 숨을 못 쉬니 ‘죽음’과 관련 있잖아요. 사랑에 빠지다, 물에 빠지다.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는데 또 엄청 상처 주기도 하잖아요. 신기한 게 우리도 물에 ‘빠지다’처럼 사랑에 ‘빠지다’라고 표현하는데, 영어로도 똑같아요. 폴인러브(Fall in Love)에서 폴(Fall)이란 단어, 좋은 것이면서도 위험성을 내포하잖아요.”
평소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그는 예상치 못한 ‘급류’에 휘말린 인생을 얘기할 때도 ‘죽음’보다 ‘사랑’을 더 많이 이야기했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둠 같은 데서도 희망을 찾아내는 게 작가의 몫이란 얘길 들은 적이 있어요. ‘그냥 해피엔딩’ 이런 게 아니라 희망을 주고 싶어요. 마냥 회피하지도 않고. 파도가 이들에게 또 닥칠 수 있지만 이들은 어쨌든 함께할 것이다, 라고요.”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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