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천재만 해야 하나요?”
요즘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추앙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에게 인생 드라마는 <네 멋대로 해라>다. 저 대사는 중년의 재즈 뮤지션들을 보면서 음악은 천재들이나 해야지 안 그러면 삶이 고달프다는 한 기자(이동건 분)에게 히트곡 하나 없는 인디밴드 키보디스트 전경(이나영 분)이 했던 말이다. 20년 전 드라마를 볼 때는 저 대사가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천재는 못 되더라도 보잘것없는 내 능력 때문에 삶이 고달플 수 있다는 상상 같은 건 아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삶은 대체로 열심히 해도 잘 안 되는 일을,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것을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과정이었다. “용석씨는 그동안 대체 무얼 배운 거예요? 왜 아직 이런 것도 똑바로 못해요?”라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내가 어떤 면에선 평균에도 못 미치는 사람이라는 걸, 노력도 배신한다는 것을 아프게 깨달았다. 결국 대단하게 뛰어난 재능이 없다면,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자고 생각하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평화단체 상근 활동가가 됐다.
저 대사를 떠올린 것은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교수 때문이다. 언론은 한국인 최초의 수상이라며(심지어 허준이 교수는 미국 국적인데도), 세계적인 천재 수학자라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허준이 교수는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현대 수학은 소수의 천재가 이끌지 않고 인류가 하나의 ‘원팀’으로서 활동한다.” 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다. 천재의 학문이라고 흔히들 생각하는 수학이나 과학이 다루는 정보의 양은 방대해졌다. 제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전체를 조망할 수 없을 정도로.
꼭 수학, 과학 분야만 그런 게 아니다. ‘천재’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스포츠 또한 마찬가지다. 타율 4할은 천재 타자들의 로망 같은 목표다. 하지만 미국의 진화생물학자이자 야구광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4할 타자가 현대 야구에서 사라진 까닭을 과학적으로 논증한다. 야구라는 생태계가 발전할수록 개별 개체 간의 격차가 줄어 별종(4할 타자)이 등장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아직 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에 존재했던 4할 타자나 30승 투수가 더 이상 나오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 사회가 발전할수록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천재의 등장은 요원해진다. 뉴턴이 지금 태어난다면 필즈상은 받겠지만 인류 역사상 최고 천재의 대접은 받지 못할 것이다.
천재가 득시글거리는 예술 분야도 마찬가지다. 대단한 파격을 선보인 그 어떤 천재도 자신이 몸담고 사는 시공간을 초월하지 못한다. 마르셀 뒤샹은 소변기를 가져다 <샘>(Fountain)이라 이름 붙이고 전시했다. 이 작품은 뒤샹 이전의 예술가들이 쌓아올린 예술의 문법에 대한 파격이다. 평범한 예술가들이 반복적으로 일궈온 예술 문법이 없다면 파격 또한 존재할 수 없다. 뒤샹 역시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가 아니라 자신이 사는 세상의 일부였다.
보통 사람들의 노력이 없다면허준이 교수는 독일 태생의 프랑스 수학자 알렉산더 그로텐디크의 말을 빌려 수학적 진보를 설명한다.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이 있을 때 대상 주변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만 같지만 저 멀리서 바다로부터 서서히 물이 차올라 조수간만이 달라져 어느덧 대상 주위를 물이 감싸 결국 대상의 껍질을 스스로 녹인다. 수학은 그렇게 진보를 이룬다.” 자연세계에서는 만유인력 때문에 바닷가에서 물이 차오르지만, 인간 사회에서 물을 차오르게 하는 것은 천재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노력이다. 수학뿐만이 아니라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이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노력이 없다면 제아무리 천재가 등장하더라도, 특별한 계기가 찾아오더라도, 껍질은 깨지지 않는다.
이용석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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