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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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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 명창이 잇는 중고제 <적벽가>

대 끊길 뻔한 중고제 <적벽가>, 박성환 명창이 스승 정광수에게 배우고 이동백 음반으로 복원
등록 2021-08-30 14:24 수정 2021-08-31 02:05
박성환 명창이 2021년 7월21일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에서 이동백제 중고제 판소리를 공연했다. 김진수 선임기자

박성환 명창이 2021년 7월21일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에서 이동백제 중고제 판소리를 공연했다. 김진수 선임기자

“중복 날인데 덥지유? 많이 덥지유?”

2021년 7월21일 저녁 7시30분,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중고제 적벽가 완창’ 공연이 열렸다. 박성환 명창(52·판소리 <춘향가> 이수자)이 진득한 충청도 사투리로 입을 뗐다. 충청도 사투리는 박 명창의 출신지(충남 논산)와 활동지(충남 공주)를 드러냈다. 더 의미심장하게는 이날 공연하는 ‘중고제 판소리’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그는 1999~2016년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한 중견 판소리꾼이자 창극 전문가다.

박 명창은 중고제의 마지막 대명창으로 꼽히는 이동백(1866~1949)의 <백발가>로 공연을 열었다. “젊어 청춘 좋은 그때 엊그젠 줄 알았더니 오늘 보니 늙었구나. (…) 안으로 들어가니 아내조차 상관 없고(않고), (…) 밖으로 나오면 아이들에게 학장질(훈장질). (…) 세월아, 있거라. 팔도 호걸들이 다 늙는구나.”

목을 푼 박 명창은 본공연인 이동백제(이동백 스타일) <적벽가>를 진양조(가장 느린 장단)로 시작했다. “당당한 유현주(유비)는 신장은 7척5촌이요. (…) 오모홍포에 쌍고검 비껴 차고 적로마상에 앉은 거동 태조의 기상이라.” 그러나 삼고초려를 묘사한 다음 대목으로 넘어가자 이내 휘중중모리로 빨라진다. “익덕의 성질은 급한지라 고리눈 부릅뜨고 검은 팔 뒤걷어 고성대질 왈, 우리 가가(형님)는 금지옥엽이라 야인촌부 저만(한) 사람 보려고 삼고초려 지극거늘 저렇듯 거만을 부려.”

충청·경기에서 불린 중고제, 담백하고 꿋꿋

박 명창은 소리 중간중간에 현재의 판소리와 ‘다른’ 중고제 판소리에 대해 구수하게 설명했다. “이동백 명창 흉내는 내보는데 될랑가 모르겄슈.” “요즘 판소리에 빠져 있다가 (중고제를 하려니) 나두 어색해서 죽겄슈.” “70~80년 전에는 지금과 다른 소리를 했던 것 같어유.” “충청도 양반이라 그런지 어려운 말이 많어유. 뜻은 자세히는 모르겄슈.” “가곡(시조를 노래로 부르는 전통 성악곡)과 비슷한 부분도 있슈.”

아쉽게도 박 명창은 이날 계획했던 <적벽가> ‘완창’을 하지 못했다. 코로나19로 공연 시간이 밤 9시50분까지로 제한돼 2시간40분짜리 이동백제 <적벽가>를 다 부를 수 없었다. 더욱이 공연 들머리엔 최혜진 목원대 교수(판소리학회 부회장)의 설명도 있었고, 공연 중에 막간도 있어서 실제 소리할 수 있었던 시간은 2시간 남짓이었다.

그러나 공연은 기념비적이었다. 중고제의 대가인 이동백제 <적벽가>가 1939년 3월 부민관(현 서울시 의회) 은퇴 공연 이후 82년 만에 다시 서울에서 불렸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동편제·서편제보다 더 오래됐고, 지역적으로 동·서쪽보다 위쪽 지역인 충청도·경기도의 판소리로 알려진 ‘중고제’가 거의 1세기 만에 다시 서울에서 선보인 것이다. 최혜진 교수는 “이번 공연을 통해 중고제 판소리가 살아 있고, 이동백제 판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전국에 알렸다”고 말했다.

중고제 판소리는 무엇일까? 중고제는 시대적 의미와 지역적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 먼저 중고제란 말 자체는 ‘중간 정도 오래된 스타일’이란 뜻이다. 19세기 초에 충청도 강경 출신 김성옥과 충청도 덕산 또는 경기도 여주 출신 염계달이 시작한 옛 스타일의 판소리를 말한다. 김성옥은 처남인 송흥록과 함께 진양조를 판소리에 도입해 근대 판소리 형식을 완성했다. 송흥록은 판소리의 중시조, 동편제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김성옥과 염계달의 중고제는 충청도 서산의 방진관, 심정순(가수 심수봉의 할아버지), 공주의 황호통, 강경의 김정근(김성옥의 아들), 서천의 이동백, 김창룡(김정근의 아들)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조선 말기 5명창인 이동백, 김창룡 이후 거의 맥이 끊어졌다. ‘제비 몰러 나간다’는 광고로 유명한 박동진 명창이 중고제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하는 정도였다.

중고제의 마지막 대명창으로 꼽히는 이동백(1866~ 1949)의 모습. 중고제 판소리 진흥원 제공

중고제의 마지막 대명창으로 꼽히는 이동백(1866~ 1949)의 모습. 중고제 판소리 진흥원 제공

‘제비 몰러 나간다’ 박동진도 중고제 영향받아

지역적으로 중고제는 조선 후기 충청도와 경기도에서 주로 불렸다. 그래서 가사에 사투리가 심하지 않으며, 향유 계급인 양반들의 영향으로 한문투가 많이 쓰였다. 발성이나 곡조도 서정적인 맛보다는 전통 시조 가곡처럼 담백하고 꿋꿋한 맛이 강하다. 그러나 옛 스타일의 중고제는 일제강점기 이후 계면조의 감성적인 판소리가 인기를 얻으면서 사실상 사라졌다.

2000년대 초반 중고제 판소리를 되살리겠다고 나선 이가 박성환 명창이다. 그는 1990년대 중후반 강도근 명창한테서 동편제 <흥부가> <적벽가>를, 성우향 명창한테서 강산제(서편제) <심청가> <춘향가>를 배웠다. 그러나 공부 중에 중고제 판소리인 이동백의 <적벽가>가 정광수(1909~2003) 명창한테 전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새로운 소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서울 북아현동 자택으로 네 번 찾아가 청한 끝에 제자가 됐다.

박 명창은 정 명창이 세상을 떠나기 전 3년 동안 이동백제 <적벽가>의 앞대목인 ‘삼고초려’를 배웠다. 중고제 판소리의 스승-제자 전승이 영원히 끊길 뻔한 아슬아슬한 3년이었다. 스승은 제자에게 “우렁차고 호방하게 호령하듯 불러야 이동백의 <적벽가> 맛이 난다”고 가르쳤다. 목으로만 내는 ‘평성’ 말고, 온몸으로 내는 ‘통성’으로 부르도록 했다.

그러나 정 명창이 남겨준 <적벽가> 앞대목은 전체의 4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머지 2시간 분량은 1935년께 나온 폴리돌 유성기 음반 <적벽가>를 참고할 수 있었다. 이 음반에선 중고제의 이동백과 김창룡, 서편제의 정정렬, 동편제의 조학진, 임소향이 함께 소리를 했고 한성준이 북을 잡았다.

박 명창은 폴리돌 음반 가운데 이동백, 김창룡의 소리는 대부분 받아들였다. 또 빅터 음반에 남은 이동백의 <적벽가> 사설도 가져왔다. 가장 분량이 많은 정정렬 소리는 줄이거나 소리(창)를 아니리(사설)로 바꿨다. 박 명창은 “정정렬도 충청도에서 소리 공부를 해서 중고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중고제 이동백, 김창룡이 서편제 정정렬과 함께 <적벽가>를 녹음했다는 것은 그들의 소리가 서로 가까웠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중고제 명창 이동백의 집 부근 길에 붙여진 ‘이동백소리길’. 김규원 선임기자

중고제 명창 이동백의 집 부근 길에 붙여진 ‘이동백소리길’. 김규원 선임기자

공주시, 중고제 판소리 보존 노력

박 명창이 복원한 중고제 <적벽가>는 어떤 판소리인가? 박 명창 자신은 “씩씩한 소리, 가공하지 않고 원재료의 맛을 살린 소리,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우렁찬 통성으로 부른 소리”라고 소개했다. 최혜진 교수는 “박 명창의 중고제 <적벽가>는 앞대목을 스승한테서 직접 배우고 뒷대목도 이동백의 음반을 토대로 해서 의미가 크다. 1960~70년대 초기 무형문화재들도 토막소리를 완창으로 확대한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중고제 판소리와 그 역사를 보존, 복원하려는 노력은 중고제의 고향인 충청도의 공주시에서 활발하다. 공주시는 조선 시대에 충청도 감영이 있던 중심지였다. 공주시는 2021년 7월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이동백과 김창룡의 집이 있었다고 알려진 옥룡동 대추골 2~3길의 이름을 ‘이동백소리길’로 바꿨다. 또 황호통이 활동한 대부호 김갑순의 사랑채와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 부근의 도로명에도 이들의 이름을 넣으려고 노력 중이다.

이 밖에 공주시는 이동백과 김창룡의 거주지, 김성옥이 소리를 연습한 계룡산 갑사 계곡 독공터, 판소리 명창들이 공연한 금강관(옛 아카데미극장), 명창 김초향의 공산성 성안마을 거주지, 공주 장악원(조선 때 국립 음악원) 등을 조사해 자료를 펴냈다. 공주시는 이를 바탕으로 국립충청국악원을 공주에 유치하고, 금강관을 전통 공연장으로 리모델링하는 사업도 추진하려 한다. 김정섭 공주시장은 <한겨레21>에 “중고제를 살리기 위해 시장 관사를 중고제판소리진흥원으로 쓰고 있다. 오늘날 판소리의 원류인 중고제를 되살려 국악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고, 충청도 국악과 문화를 전국에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중고제 판소리는 앞으로 어떻게 보존, 발전시킬 수 있을까? 박성환 명창은 “이동백제 <적벽가>는 기본 틀이 잡혔다. 앞으로 더 숙성시키고 음반, 기록 작업을 하려고 한다. 중고제 <적벽가>를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고, 후학을 키우는 일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 명창은 <적벽가> 외에 <춘향가>나 <심청가> 등 다른 판소리를 중고제로 복원하는 일에는 부정적이었다. “원재료가 없는 상황에서 복원은 불가능하다. 중고제로 창작하는 것도 큰 의미가 없다. 창작은 이날치 밴드처럼 완전히 현대적으로 해야 한다.”

중고제 복원, 다양성 차원에서 의미 깊어

김혜정 경인교육대학교 교수는 “중고제를 복원하는 것은 판소리의 다양성 차원에서 의미가 크다. 중고제의 특성을 되살리는 게 필요하다. 충청도의 중고제는 현재 판소리보다 리듬감이 좋고, 감정 표현이 절제돼 있으며, 발성도 좋다. 동시에 옛 스타일인 중고제를 현대 사람들에 어떻게 전달할지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중고제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문제도 관심거리다. 최혜진 교수는 “판소리의 고전인 중고제는 전승, 보존할 가치가 분명하므로 하루빨리 (무형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 중고제 명창한테서 직접 전승받은 소리가 분명하므로 지정할 수 있다. 완판이 아니지만, 과거의 지정 사례에 비춰보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의 변지현 무형문화재과장은 “문화재 지정이 판소리 유파에 따라 제한되지는 않는다. 또 100% 스승한테서 배운 게 아니고 음반을 통해 완성했더라도 지정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중고제 판소리의 ‘전형성’을 갖고 있느냐”라고 말했다.

공주=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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