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길을 네 번이나 걸어도, 매일 새로웠다. 날씨, 계절,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이 다르니 단 한 번도 같지 않았다. 우리 인생도 매일 반복되는 것 같지만 매일 새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윤승환(37)씨는 금융권에서 7년 동안 일하다가 2020년 1월 퇴사했다. 일을 쉬고 해외여행을 다녀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코로나19로 국외로 갈 수 없게 되면서 제주로 눈을 돌렸다. 누군가와 모임을 할 수도 없으니 자연이 다가왔고, 제주올레길은 비교적 안전해 보였다. 윤씨는 2021년 5월, 23일 만에 26코스를 완주했고, 현재까지 모두 네 번 완주했다.
윤씨는 11코스를 꼭 걸어보라고 추천했다. “11코스는 가장 인기 없는 코스 중 하나다. 완주자들은 11코스를 ‘산 자와 죽은 자의 길’이라고 부른다. 바다를 볼 수 있는 구간이 많지 않고 대부분 밭과 공동묘지다. 그러나 이 길이 올레길의 진정한 의미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산 자는 밭을 일구고 죽은 자는 묻혀 있는 걸 동시에 보면, 삶과 죽음은 한 끗 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삶의 의미는 뭔지 생각해볼 수 있다.”
올레길 완주는 윤씨의 진로를 바꿨다. “제주를 걸으며 겉을 핥았으니, 제주의 속까지 보고 싶어 아예 정착했다. 8월부터 제주 농산물과 과일을 판매하는 일을 한다.”
코로나19로 전 국민이 우울했던 2020년, 청년들은 제주올레길로 향했다. 이들은 26개 코스(총길이 425㎞) 완주에 도전했다. 올레길에는 코스마다 시작-중간 지점-종점 스탬프가 있는데 이 스탬프를 ‘제주올레 패스포트’에 모두 찍으면 완주 증서를 받을 수 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가 집계한 자료를 보면, 2020년 제주올레길 26개 코스를 모두 완주한 사람은 2778명이다. 코로나19 사태 직전인 2019년 완주자 1624명에 비해 71% 늘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2030 청년층 완주자 수다. 2019년 2030 완주자가 268명에 그쳤는데 2020년에는 539명으로 두 배 이상 급증했다. 이 흐름은 올해도 이어져 2021년 5월까지만 해도 완주자가 이미 1818명이고, 이 중 청년 완주자는 222명이다.
유독 올레길을 걸은 2030이 많아진 이유는 무엇일까. 2019년 8월부터 25일간 올레길을 완주한 임승윤(33)씨도 윤씨처럼 퇴사가 계기가 됐다. “지금 아니면 못 쉰다는 생각이 들어 3년7개월 동안 다니던 회사에서 퇴사했다. 이제는 평생직장이란 말도 없지 않나.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혼자 걸으며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었다.”
임씨가 걸은 시기는 장마철이라 15일 연속 비가 왔다. 길 위엔 사람이 없었고, 게스트하우스에도 손님이 없어 대부분 혼자 다녔다. 그러다 올레길에서 쓰레기를 줍는 ‘클린올레’ 활동을 하던 아주머니 2명을 만나 함께 걸었다. “김밥과 커피도 나눠 마시고 농장에서 수박도 얻어먹었다. 지난해 다시 제주에 갔는데 당시 함께 걸었던 아주머니 중 한 분이 올레길센터 직원으로 일하고 있어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 소중하고 감사한 인연이다.”
올레길 완주 뒤 용기를 얻은 임씨는 강원도 철원을 시작점으로 해 걸어서 대한민국을 한 바퀴 돌기도 했다. 걷기는 그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을까. “회사를 다닐 땐 마음이 급했다. 퇴사가 무모할 수도 있지만, 천천히 걷는 여행을 해보니 인생을 급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
윤씨는 최근 과거와는 전혀 다른 업계에 취업했다. “올레길 완주를 통해 내 길을 갈 수 있는 정신력을 얻었다. 남들보다 늦어도 내가 가는 길 자체가 중요하다.”
성취감, 자아성찰, 새로운 시작…윤씨와 임씨 모두 퇴사 이후 올레길을 걸으며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진로를 찾아나섰다. 제주올레가 청년 완주자에게 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 3명 중 1명은 완주 이유를 “도전 후 성취감을 얻기 위해서”(64.3%, 복수응답)라고 답했다. 그다음으로 “자아성찰”(49.6%)과 “새로운 시작”(40.9%)을 꼽았다. 제주올레 김희경 리서치 전문위원은 “청년들은 코로나 시대 이전에는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외여행을 택했지만, 하늘길이 막힌 상황에 대안으로 청정 제주 자연을 마주할 수 있는 도보여행길 제주올레로 발길을 돌렸다”며 “도보여행이야말로 코로나 우울증을 극복하고 제주와 친해지기 위한 완벽한 방법임을 청년 완주자들이 새삼 확인시켰다”고 말했다.
청년 완주자가 증가하자 제주올레는 2021년 5월 청년 맞춤형(1982~2003년 출생자만 구매 가능)으로 변형한 한정판 ‘노네임 패스포트’를 출시했다. 노네임 패스포트를 소지하면 제주 지역 식당, 숙소, 체험 업체 등에서 다양한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인터뷰/ 1만 번째 완주자 윤계옥씨
“1만 번째 완주자가 도착했어요. 두 분이 동시에 들어왔어요!”
2021년 6월4일 밤,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선 함성이 터져나왔다. 2012년 11월, 첫 완주자가 나온 이래 9년 만에 1만 번째 완주자가 나왔다. 그 주인공은 윤계옥(65)씨. 1만1번째 완주자로 기록된 여동생 윤은옥(61)씨와 2020년 5월, 10월, 2021년 들어선 2월, 3월, 4월, 6월 초 총 여섯 차례 걸쳐 3박4일, 4박5일씩 제주를 찾아 26개 코스(총길이 425㎞) 대장정을 끝냈다.
40여 년간 직장을 다닌 윤씨는 2019년 2월, 퇴직했다. 퇴직 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는 막연한 꿈을 가졌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국외에 나갈 수 없었다. 국내로 눈을 돌렸다. 60대가 걷기 어렵지 않고 사람이 많지 않으며 비교적 안전한 제주올레길을 완주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여행사를 다니던 동생이 코로나19 확산으로 휴직 중이어서 같이 걷자고 제안했다.
처음엔 무작정 배낭을 메고 걸어 짐 때문에 고생했다. “걸을 수 있는 만큼 걷고, 다 걸으면 숙소를 잡았다. 배낭이 무거워 고관절이 아팠다. 올해부턴 시작점에 숙소를 잡고 종점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숙소로 오는 방식을 택했다.”
제주를 구석구석 걸으며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을까. 윤씨는 온종일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추자도와 동백꽃·벚꽃 등 꽃을 보며 걸었던 길을 떠올렸다. 의외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입학식이 다가오던 2월 말 북제주초등학교 교문의 펼침막 글귀를 본 때라고 했다. “학교 앞을 지나는데 ‘향기롭고 따듯해서 봄이 온 줄 알았는데 너희들이 왔구나’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제주 구석구석을 걸었기에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글,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걸으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다투진 않았는지 물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었다”며 ‘찐자매’ 같은 대답을 내놨다. “둘 다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라 안 맞은 적도 있었지만, 잠깐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가족인 덕분이다.”
425㎞를 걸어 1만 번째 완주자로 기록된 것은 윤씨의 60여 년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 “많은 사람이 완주하고 시기상 1만 번째 된 것뿐인데 주목받아 얼떨떨하다. 길이 있으니까 걸었을 뿐이다. 앞으로 제주올레길을 또 걷거나 다른 둘레길도 걷고 싶다. 산티아고 순례길도 언젠가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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