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 야구팬은 아침이 즐겁다. 류현진(33·토론토 블루제이스)과 김광현(32·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투구를 보는 재미 덕분이다. 프로야구를 대표했던 두 투수는 나란히 메이저리그에서 새로운 한국 야구의 페이지를 써내려가고 있다. 20대 시절 150㎞ 넘는 강속구를 가볍게 뿌리던 둘은 30대가 된 뒤 예전 같은 공은 던지지 못한다. 미국 메이저리그야구(MLB) 통계 사이트 ‘팬그래프닷컴’에 따르면 올 시즌 류현진의 포심패스트볼(직구) 평균 구속은 145.5㎞, 김광현의 구속은 145.2㎞이다. MLB 선발투수 평균(149.9㎞)에 미치지 못한다. 강속구 없이도 메이저리그에서 마운드를 굳건히 지키는 둘의 비결은 무엇일까.
류현진은 2015년 어깨 수술을 받았다. 회복 확률이 높은 팔꿈치 수술과 달리 어깨 수술은 투수에게 치명적이다. 다행히 재활은 잘됐지만, 류현진의 구속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류현진의 트레이드마크는 변화구 체인지업이다. 직구와 똑같은 폼에서 비슷한 코스로 날아가 아래로 가라앉는 체인지업에 타자들의 방망이가 헛돌았다. 하지만 직구의 힘이 떨어지자 체인지업 효과도 덩달아 떨어졌다
어깨 수술 후 새 무기 장착
류현진은 새 무기를 선보였다. 첫째는 투심패스트볼. 류현진은 부상 이후 팔에 무리가 가는 슬라이더 비중을 줄였다. 대신 포심패스트볼과 비슷한 빠르기에서 살짝 가라앉는 투심을 던졌다.
타자들이 이에 적응하자 이번엔 컷패스트볼(커터)을 장착했다. 릭 허니컷 투수코치의 조언으로 장착한 커터 역시 패스트볼처럼 날아가지만, 마지막엔 오른손 타자 몸쪽으로 휜다. 직구로 생각하고 휘둘렀다간 방망이 아래에 맞고 땅볼이 되기 일쑤다. 류현진은 “커터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올해는 ‘제5의 무기’ 커브 활용도를 높였다. 2014년 조시 베킷에게 그립을 배운 뒤 한동안 쓰지 않았지만, 타이밍을 빼앗는 용도로 쓰고 있다.
다양한 공을 던지는 건 프로 선수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 누구를 상대하든 원하는 곳에 던질 수 있는’ 완성도가 중요하다. 송재우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타자 입장에서 류현진은 힘든 투수다. 다양한 구종을 원하는 곳에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수싸움에서 항상 유리하게 끌고 간다”고 설명했다.
사실 토론토 이적은 류현진에게 큰 도전이다. 4년 8천만달러(약 950억원)란 조건은 좋았지만, 난관이 많았다. 내셔널리그와 달리 아메리칸리그는 지명타자제도가 없다. 투수가 9번 타자였던 2019년보단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다. 투수친화적인 다저스타디움도 쓸 수 없다. 신예 선수로 리빌딩 중인 토론토는 다저스처럼 좋은 동료가 많지 않아 동료들 도움을 받기도 힘들다. 3.19의 준수한 평균자책점(9월9일 기준)을 기록하고도 9경기에서 3승(1패)에 그치고 있다.
토론토는 류현진 영입 효과 톡톡히 누려
류현진은 과거 어린이 야구선수에게 ‘수비를 믿지 말고, 삼진을 잡으라’고 조언했다. 최근 그 말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2019년엔 인플레이 타구(파울이 되지 않고 페어 지역에 떨어진 타구) 아웃카운트와 삼진의 비율이 7 대 3 정도였는데, 올해는 5 대 5가 됐다. 9월3일 마이애미 말린스와의 경기가 대표적이다. 수비 실책과 주루사가 쏟아졌지만 류현진은 꿋꿋이 버텼고, 삼진 8개를 뽑아내며 6이닝 2실점(비자책) 승리를 따냈다.
토론토는 류현진 영입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류현진이 등판한 경기에선 7승2패를 거뒀다. 구단 사상 최고액으로 영입한 투수답게 에이스 역할을 했다. 2016년 이후 가을야구를 하지 못한 토론토는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2위를 달리고 있다. 올 시즌 한시적으로 확장된 포스트시즌(진출팀 12개→16개)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3월, 김광현은 세인트루이스 스프링캠프의 최고 스타였다. 기대 이상의 투구가 이어졌고, 구단과 현지 취재진은 연일 호평을 쏟아냈다. 5선발 자리도 유력해 보였다. 하지만 코로나19가 김광현을 가로막았다. 캠프는 중단됐고, 시즌 개막 여부도 불투명했다. 대다수 선수가 집에 돌아간 사이, 김광현은 플로리다에 남았다. 이 기간 김광현이 남는 시간을 보낼 때 한 일은 ‘잠자기’였다.
우여곡절 끝에 개막을 맞이했지만 김광현의 보직은 ‘마무리 투수’였다. 개막이 늦춰지면서 선발 기회가 사라졌다. 김광현은 7월25일 피츠버그 파이리츠와의 데뷔전에서 1이닝 2피안타 2실점(1자책)으로 세이브를 올렸다. 하지만 이번엔 다시 행운이 찾아왔다. 팀 내 부상 선수가 늘면서 선발 보직이 돌아왔다. 팀 내 코로나19 확진자가 생기면서 선발을 준비할 시간도 벌었다. 기대와 우려의 시선이 교차했다. 하지만 김광현은 8월18일 시카고 컵스전에서 3⅔이닝 1실점으로 무난한 선발 데뷔전을 치렀다. 닷새 뒤엔 신시내티를 상대로 6이닝 3안타 1실점 하고 첫 승을 따냈다. 이후 2경기에서도 호투는 이어졌다. 선발로 나선 4경기의 성적은 2승 무패 평균자책점 0.44. 페르난도 발렌수엘라(1981년, LA 다저스)의 선발 첫 4경기 평균자책점 0.25(36이닝 1자책점) 이후 최저 기록이었다.
내셔널리그 신인왕 후보, 김광현
김광현을 신인 시절부터 지켜본 김정준 SBS스포츠 해설위원은 “김광현의 투구는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똑같다. 솔직히 운이 따랐다. ‘BABIP신(神)’의 도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BABIP(Batted Average on Balls In Play)는 인플레이 타구가 안타가 되는 비율을 말한다. 강한 타구를 만들지 못하면 낮아지지만 대체로 0.250~0.350에 머문다. 그런데 올 시즌 김광현의 BABIP는 0.189다. 김정준 위원은 “삼진수가 적고, 야수 정면으로 간 타구도 많았다. 코로나19로 시즌 준비 과정이 힘들어서인지 베스트 컨디션은 아니다. 분명히 지금보다는 실점이 늘어나긴 할 것”이라고 했다. 슬라이더는 예리하지만, 빠른 공 속도는 140㎞대 초반에 머물고 있다.
그럼에도 김광현의 투구를 나쁘게 볼 수 없는 건 스스로 이런 상황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김정준 위원은 “포수 야디에르 몰리나의 사인을 받아들이고 빠른 템포로 투구한다. 또, 안타를 맞아도 집중한다. 예전이라면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20대 때 없던 ‘경험’이 쌓이면서 흔들리지 않게 됐다. 그게 지금의 행운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송재우 위원은 “구위로 승부하지 않고, 속도와 방향을 바꿔가는 투구 패턴이 인상적”이라고 했다. 인복도 있다. 세인트루이스는 통산 166승을 올린 베테랑 투수 애덤 웨인라이트를 김광현의 훈련 파트너로 붙여줬다. 포수 몰리나는 직접 김광현의 불펜 투구를 받아주면서 김광현의 공과 성향을 파악했다. 한국인 어머니를 둔 토머스 현수 에드먼도 김광현의 적응을 도왔다. 코로나19 대유행 사태에서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최선을 다한 김광현의 모습은 구단과 동료들에게 믿음을 줬다.
순항을 이어가던 김광현은 9월5일 신장 문제로 복통을 일으켜 입원했다. 다행히 이튿날 퇴원했고, 8일부터 훈련을 재개했다. 13일 시작되는 신시내티 3연전에 등판할 것으로 보인다. 현지에선 김광현을 내셔널리그 신인왕 후보로 조명하고 있다. 남은 네댓 차례 등판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김효경 <일간스포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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