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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감독 “인위적인 건 못 견뎌요”

첫 장편영화로 호평받은 윤단비 감독 인터뷰
등록 2020-09-05 01:06 수정 2020-09-05 02:12
류우종 기자

류우종 기자

콩국수, 비빔국수, 잡채, 방울토마토, 포도 등 여름을 상징하는 다양한 음식과 과일을 다섯 식구가 나눠 먹는 장면들이 스크린 속에 펼쳐진다. 이쯤 되면 누구 한 사람이 소리를 질러야 하는 타이밍인데, 누군가 밥상을 엎고 나가야 하는데…? 그러나 가족은 아무 갈등 없이, 맛있게 식사를 마친다.

그동안 수많은 영화 속 가족 간 갈등 장면은 바로 식사 장면 아니던가. 그러나 8월20일 개봉한 <남매의 여름밤>엔 악역도, 별다른 사건도, 갈등도 없다. 이 영화는 여름방학 동안 아빠와 함께, 할아버지의 오래된 2층 양옥집에 지내게 된 10대 남매 옥주와 동주가 겪는 이야기다. 누구나 겪을 법한 가족의 일상을 차분하고 담백하게 담아냈다. 9월1일, 서울 잠원동에서 영화 <남매의 여름밤>을 만든 윤단비(30·사진) 감독을 만났다.

등장인물이 주제와 의도를 전하지 않도록

“영화 속 식사 장면을 보면,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나잖아요. 끝까지 편안하게 밥을 먹는 경우가 잘 없죠. 주인공들이 맛있고 편안하게 밥을 먹었으면 했어요.”

윤단비 감독이 처음 생각했던 시나리오는 블랙코미디에 가까웠다고 한다. “가족이 할아버지 유산을 탐내는 내용이었어요. 아빠는 할아버지의 집, 엄마는 보험금, 아이들은 수석 같은 것을 탐내면서 현실도피하는 내용이었죠. 그러다 너무 허구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첫 영화라 무서워서 장르적으로 기댄 건 아닐까 싶어 아예 다시 썼죠.”

영화에서 나오는 말은 일상적이고 짤막하지만 과거 어떤 사건을 짐작할 수 있도록 복합적으로 구성됐다. 특히 대사로 모든 걸 설명하기보다 상황이 스스로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했다. 영화 초반엔 초등학생·중학생인 남매는 왜 엄마와 같이 살지 않는지, 왜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게 됐는지, 할아버지는 얼마나 아픈지 등 가족의 사연이 자세히 나오진 않는다. “인물이 주제를 이야기하거나, 감독의 의도를 전하는 걸 경계했어요. 또 대사가 전형적이지 않길 바랐어요. 부모님이나 주위 어른들을 보면, 가정사를 이야기할 때도 해학적이거든요. 고모가 고모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 괴롭히려고 태어난 요괴 같아’라고 한 말도 사실 저희 엄마가 아빠에 대해서 한 말이에요.(웃음)” 처음엔 잠깐 들르는 듯 나왔던 고모는 짐을 싸들고 아예 들어온다. 그러다 고모부가 찾아와 소란을 피우면서 고모와 고모부의 갈등이 드러난다. 주인공 남매의 아빠도 이혼하고, 사업 실패 뒤 ‘짝퉁’ 운동화를 파는 용달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린다는 내용이 펼쳐진다.

공간의 빈자리를 주인공으로

대사보다는 공간에 주목하는 촬영 방식도 인상적이다. “인물 각자의 사연을 구체적으로 보여줄수록 몰입도가 떨어질 것 같았어요. 관객이 자기 기억을 환기할 수 있게 하고 싶었죠. 그래서 편집하며 여백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장면 전환을 빨리 하고 다음 컷으로 넘길 수 있는 것도 많았는데 일부러 다 보여줬죠. 연기로만 장면을 이어가지 않고, 인물이 떠나고도 남아 있는 공간의 빈자리를 보여주려 했죠.”

영화 속 공간과 음악 역시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 주요 촬영 공간인 2층 양옥집은 윤 감독이 두 달 이상을 돌아다니다 발견한 집이다. 실제 그곳에는 아이들을 기르고 출가시킨 노부부가 살았다. 그 집에 있던 집기와 소품을 그대로 활용했다. 음악도 많이 삽입하지 않고, 이조차 자동차 라디오나 집에 있는 오디오 등을 통해 흘러나오도록 연출했다. “인위적인 것을 못 견디는 성격이에요. 인천에 구옥이 많은 동네가 있다는 걸 알고 찾아갔는데, 집을 보자마자 여기서 찍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장기간 대여할 수 있는 집이 아니라서 여러 번 간곡하게 설득했죠. 원래 시나리오에선 할아버지 텃밭이 관리가 안 된 채 황폐한 느낌으로 존재했지만, 실제 집의 텃밭에는 방울토마토나 고추, 포도가 잘 자라고 있었죠. 그래서 시나리오를 수정했어요. 관조적 시선을 유지하려고 음악 역시 인위적으로 삽입하지 않았아요.”

신중현이 만든 노래 <미련>을 임아영·장현·김추자가 부른 세 버전으로 각기 다른 장면에 넣은 것도 눈에 띈다. 특히 할아버지가 1층 소파에서 노래를 들을 때, 옥주가 1층으로 내려가지 않고 2층에서 들으면서 할아버지의 시간을 지켜주는 모습은 명장면으로 꼽을 만하다. “옥주가 사건을 일으켜서 할아버지가 도와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전개하고 싶진 않았어요. 옥주가 1층에 내려가지 않은 것은 할아버지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죠. 다만 옥주 입장에선 나중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때 내려가서 같이 들을걸 하고요.”

이 장면은 윤단비 감독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돌이켜보면 어쩔 수 없는 그런 시기가 있는 것 같아요. 어릴 때 할머니랑 같이 살았는데, 당뇨 합병증을 앓고 계셔서 커피를 드시면 안 됐어요. 부모님 몰래 커피를 달라고 하셨는데, 드려도 안 될 것 같고 안 드려도 마음에 걸려서 할머니를 피했어요. 지금 그때로 돌아가면 조금 더 현명하게 대처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그리움, 죄책감이 남아 있죠. 그런 마음을 담았어요.”

‘중무장하고서라도 봐야 할 영화’

사춘기 소녀 옥주는 자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엄마가 보고 싶으면서도 엄마를 만나고 온 동생 동주에게 “넌 자존심도 없냐”고 구박한다. 윤 감독은 옥주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캐릭터라고 했다. “옥주가 아빠에게 쌍꺼풀 수술을 해달라고 할 때도 그냥 말하지 못하고 ‘돈을 갚을 테니 수술 비용을 빌려달라’고 말하잖아요. 저 역시 그랬어요. 자존심이 세고, 뭔가를 강하게 요구하지 못하고 완곡하게 말하는 스타일이었죠.” 그렇게 감정 표현에 솔직하지 못했던 옥주가 눈물을 펑펑 흘린다. “언제 감정을 터뜨릴까 고민했어요. 꾹꾹 참다가 우는 게 맞을 것 같았어요. 방학 동안 옥주도 성장한 셈이죠.”

<남매의 여름밤>은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시민평론가상 등 4개 부문을 휩쓸었고, 2020년 네덜란드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밝은미래상을 받았다. 호평 일색에도 코로나19가 다시 확산한 때 개봉해 아쉬움이 클 법하다. “그래도 관객이 ‘중무장하고서라도 봐야 할 영화’라고 SNS에 올려주신 걸 봤는데 뭉클하더라고요. 영화를 만들면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란 불안감도 있었어요. 그래서 이 시기에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관객이 영화를 발견했을 때 소중하게 기억하길 바라요.” 윤단비 감독은 관객의 반응을 이야기하며 조금 울먹였다. 떨리는 목소리에서, 조심스럽게 고르는 단어에서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영화를 보고 나서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잊히지 않는 영화, 쉽게 휘발되지 않는 영화면 좋겠다”는 그의 말처럼.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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