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바다는 잔잔했다.
8월16일 오후 전라남도 여수시 만흥동. 너른 남해를 마주한 마래산 아래 풀이 무성하게 자란 빈터가 있다. 시멘트 바닥에 한복을 입은 여성의 그림과 글귀가 보인다. ‘아 여순이여!’ 그곳에 덩그러니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가 세워진 연도는 2009년 10월19일이다. 그 위령비 뒤에는 ‘……’ 점 6개만 있다. 글귀가 없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19일 전남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4·3을 진압하라는 출동 명령을 거부한 뒤 봉기와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과 토벌대 1만여 명이 숨진 현대사의 비극이다. 사건이 일어난 지 71년째인 올해 재심이 진행돼, 4차 공판이 10월에 열릴 예정이다. 진상 규명 등을 위한 특별법 4개 안이 국회에 계류돼 있다. 여순사건은 7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 역사적 성격, 진상 등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
‘……’ 점 6개에 담긴 분노, 한, 울분이날 한국작가회의에 소속된 소설가 현기영, 소설가 이경자, 시인 김진수, 소설가 한창훈 등 작가 20명이 이곳에 모였다. 이들은 여수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는 ‘문학작가 여수 팸투어’에 참석했다. ‘70년 비극’ 앞에 서서 누군가는 생각에 잠겼고 누군가는 먼바다를 봤고 누군가는 무성하게 자란 풀을 뽑았다. 위령비의 말줄임표처럼 잠시 말을 잃었다.
여수에 사는 김진수 시인이 위령비 제작에 얽힌 이야기를 꺼냈다. “위령비에 새길 ‘학살’이라는 단어를 두고 당시 여수시와 갈등을 빚었어요. 여수시는 학살이라는 단어를 쓰는 걸 꺼렸어요. 그러다 고심 끝에 점 여섯 개만 찍고 말았어요.” 그가 지난해 펴낸 여순사건 관련 시집 에 수록한 시편 ‘나말이어라’에 “이 여섯 점 침묵 속에 그들의 원혼과 유족들의 통한을 한 줄도 빠짐없이 모두 새겨넣었다”라고 썼다. 그 점 6개에는 유족들이 속으로 삭여야 하는 분노와 한, 울분 등이 담겨 있다는 얘기다.
위령비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는 ‘형제묘’가 있다. 1949년 1월 여순사건 민간인 부역 혐의자 125명이 숨진 곳이다. 불태워진 가족의 주검을 찾을 수 없었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하라고 형제묘를 만들었다. 여순사건으로 외할아버지를 잃은 김진수 시인은 “여수의 아픈 역사를 문학으로 어떻게 해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여수 밤바다의 낭만 너머 비극적 역사를 담아내는 것 또한 문학인의 책무이기에 말이다.
제주4·3을 다룬 소설 의 현기영 작가는 여순사건 희생자들의 흔적을 찬찬히 더듬었다. “환한 빛만 보는 게 아니라 어둡고 아픈 역사도 돌아봐야 하죠. 제주에서도 4·3을 기억하기 위한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 프로그램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요. 여수에서도 아픈 역사를 돌아보는 프로그램이 많이 진행됐으면 해요.”
“다섯 번에 또 다섯 번/ 쏴 죽이고, 장작 덮고, 기름을 붓고/ 그렇게 일백이십오 명이나/ 생때같은 목숨들을 도륙하고 불 질렀다/ 사흘 밤낮 타는 것을 지켜보다가/ 바윗돌을 굴려다 덮어버렸다/ /시커멓게 엉겨붙어 형체 잃은 주검을 낱낱이 수습할 수 없었던 통한의 유족들은/ 천만 근 연좌 무덤 독담불에 몰래 가서/ 그렁그렁 흙을 덮고 형제묘라 불렀다”(김진수 시인의 시 ‘형제무덤’ 중에서)
다음날 8월17일 오전, 작가들은 여수여객선터미널에서 거문도행 배를 탔다. 한창훈 작가는 “오늘은 바다가 장판이다”라며 “운이 좋은 날”이라고 했다. 1년에 몇 번 손에 꼽을 정도로 파도가 잔잔한 날이라는 뜻이다. 고흥 나로도, 손죽도, 초도를 거쳐 2시간30분이 지나자 거문도가 보였다. 거문도는 여수항에서 남서쪽으로 114.7㎞ 떨어진 다도해의 최남단 섬이다. 서도, 동도, 고도라는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 이 섬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큰 배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항구 구실을 한다. 입지 여건 때문에 거문도항은 예로부터 열강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그중 하나가 ‘거문도 사건’이다. 영국이 1885년 4월부터 2년간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사건이다. 당시 질병과 사고로 죽은 영국군 수군묘비와 영국군이 설치한 해밀턴 테니스장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만든 신사 터도 남아 있다.
거문도에서는 고개를 돌리면 바다를 볼 수 있다. 거문도가 고향인 한창훈 작가는 10살 때 거문도를 떠난 뒤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다른 분들은 고향이 애증의 공간이라고 하는데 나는 ‘애’만 있는 곳이에요. 푸른 바다, 마음껏 놀던 좋은 기억만 있어요. 젊을 때도 언젠가 돌아가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등 줄곧 섬과 바다 사람들 이야기를 문학에 담아온 그는 “산이 마음을 집중하게 하지만 바다는 마음을 풀어준다”며 “그래서 마음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 바다”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책 제목처럼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고 조언한다. 바다 예찬이 이뿐이랴. 그의 책 에서 “저리도 너른 것이 저리도 평평했다”라며 층이 존재하지 않는 ‘평등’의 모습도 조명했다.
거문도에 다시 내려와 마을에 녹아든 한 작가의 소개로, 작가들은 거문도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만났다. 황현진 작가는 ‘거문도는 사람들 이야기의 성찬 같은 곳’이었단다. “소설 쓰는 사람이라 어딘가를 가면 사람들의 이야기에 끌려요.” 황 작가는 섬에서 맞선을 보려 했던 여인을 찾아 섬을 세 바퀴나 돌았지만 못 만났다가 20년 만에 우연히 만났다는 치킨집 사장님, 휴가 때 거문도에 왔는데 섬 총각과 눈이 맞아 17년째 이곳에서 식당을 하는 사장님 이야기를 들었다. “제게 거문도는 내가 만난 사람들로 기억될 것 같아요.” 그들의 이야기는 특별하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만남에는 사소한 우연들이 겹친다면, 이곳 사람들의 만남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현상과 거기에 뒤섞인 극적인 운명 같은 느낌이에요.”
유현아 시인은 일행과 함께 아침밥 먹는 시간을 놓쳐 무작정 찾아간 식당 주인이 잊히지 않는단다. “식당 주인이 처음 본 저에게 새 이야기를 했어요. 동박새 두 마리를 키웠는데 한 마리가 날아가서 남은 한 마리가 매일 슬피 운다고요. 새 먹이를 너무 많이 사서 그걸 다 줄 때까지 데리고 있다가 날려보낼 거라고 하네요.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늦은 허름한 아침 식사였지만 풍성한 느낌이 들었어요.” 시인인 그는 낯선 공간에서 만난 이들의 ‘자기 서사’를 듣는 일이 언제나 설렌다고 한다.
작가들 마음속에 저장된 등대길, 백도도시를 떠나 만난 새로운 공간은 창작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거문도에 가면 꼭 찾아야 할 곳으로 꼽히는 백도가 그렇다. 거문도에서 배 타고 50분 정도 가야 볼 수 있는 무인도다. 이곳을 둘러본 정미영 동화작가는 “백도는 판타지의 공간”이었다고 한다. “발을 디딜 수 없는 그 공간을 배에서 하염없이 바라봤어요. 30∼40분쯤 됐을 거예요. 여러 가지 상상을 했어요. 섬은 가상의 세계이고 그곳에 난 구멍을 보며 터널에 사는 누군가를 생각했어요. 동화의 배경이 될 수 있는 곳이었어요.”
소설 의 심윤경 작가는 거문도의 등대길, 백도 등 이 공간 저 공간을 마음에 저장한다. 그 모든 것이 글의 재료이다. “소설을 쓸 때 어느 순간 뜻하지 않게 상상적인 공간이 필요할 때 내가 갔던 공간이 불쑥 떠올라요. 어느 순간 ‘내가 온 이곳도 소설에 나오겠구나’라고 생각해요. 여수, 백도, 거문도도 어느 날 어떤 인물과 어떤 감정으로 소설 속에 결합될지 모르죠. 이 여행이 선물 같았듯, 내 작품에도 이날들이 선물처럼 올 거라 생각해요.”
작가들에게 이날만큼은 만나고 싶은 작가를 만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2015년 단편소설 ‘얼룩, 주머니, 수염’으로 등단한 이지 작가는 만나고 싶었던 선배 작가를 만나 조언도 들었다. “현기영 선생님이 조언을 많이 해주셨어요. 항상 메모하고 메모한 것을 바로 들여다보지 말고 나중에 보라는 말을 해주셨어요.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게 중요하다고요. 나중에 보면 자기가 쓴 게 달라 보일 거라고요. 글을 묵혔다 쓰라는 말도요.”
김진수 시인은 여수와 거문도에서 느끼는 음식이 이 지역의 또 다른 맛깔난 이야기라고 말한다. 음식은 그 지역의 문화와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전라도의 맛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뭔지 아나요? 어떤 분들은 감칠맛 난다, 담백한 맛이라고 하는데 아니에요. ‘게미진 맛’이죠. 이게 전라도 사투리인데 먹으면 먹을수록 자꾸 당기고 그리워지는 맛이에요. 푹 삭힌 갓김치처럼요.”
한바탕 신나게 ‘산다이’거문도에서 맞는 밤, 작가들은 유림해수욕장 앞에서 마을 사람들과 음악잔치를 열었다. 거문도 주민들로 구성된 밴드 한울타리의 연주로 마을 주민과 작가들이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산다이’였다. 전라도 섬 지방에서 쓰이는 말 산다이는 “또래끼리 어울려 한바탕 신나게 논다”는 뜻이다. 여흥, 축제의 뜻으로 쓰이는 단어다. 이곳 거문도에서도 예전부터 내려온다. 유현아 시인이 말했다. “밖에서 보기에는 외로운 섬 같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은 이렇게 어울려 공동체 삶을 살고 있었어요. 그런 삶이 어떤 절경보다 아름다웠어요.”
1박2일의 거문도 여정을 마치고 작가들은 여수행 배에 몸을 실었다. 여름 끝에 떠난 여행의 마지막 날. 그들이 보낸 그 섬에서의 시간은 어떤 이야기의 시작이 될까. 거문도가 점점 멀어졌다.
여수=글·사진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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