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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양순씨

등록 2019-07-02 20:40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김양순 부분회장이시죠?” “네. 그런데 이왕이면 수석이란 말을 붙여주세요. 수석부분회장이라고.” “아, 그러시군요. 앞으로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수석부분회장님!” “하하. 수석이라는 말을 붙이면 뭔가 있어 보이잖아요.”

처음 만났을 때 주고받은 대화다. 매주 수요일 저녁,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진행하는 한 시간 동안의 선전전을 마치고 뒤풀이를 하던 자리였다. 그 뒤로도 양순씨를 몇 번 더 만났다. 만날 때마다 양순씨는 유쾌한 표정이며 말투를 보여주었다.

세 번의 해고

양순씨는 다니던 공장에서 세 번 해고당했다. 첫 번째 해고 시점부터 따지면 그동안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양순씨가 다니던 공장은 서울 염창동에 있던 시그네틱스라는 반도체 제조업체였다. 최초의 외국인투자 기업이었다가 필립스가 철수한 뒤 거평그룹에 이어 지금은 영풍그룹 산하에 있다.

비극의 시발점은 1990년대 후반에 세운 경기도 파주공장이었다. 거평에서 시그네틱스를 인수한 영풍그룹 눈에 노동조합이 거슬렸다. 파주공장은 소사장제를 도입해 사내하도급 방식으로 운영하고, 대신 안산에 작은 공장을 하나 더 세워 조합원들을 모두 안산공장으로 발령 냈다. 파주공장 노동자를 전원 비정규직으로 바꿔치기하면서 노조가 없는 꿈의 공장(?)으로 만든 것이다. 안산공장 발령에 반발한 노동조합은 파업했고, 파업 참가자 모두가 해고됐다. 파주공장을 세울 때 노동자 대표로 첫삽뜨기 행사에 참여했던 양순씨도 해고자 신세가 되었다. 그게 2001년이었다.

해고자들은 그 뒤 두 차례 한강대교 고공농성, 11일간의 집단단식, 수없이 되풀이한 노숙투쟁 등 할 수 있는 투쟁을 모두 해봤다. 그러다 2006년 말 대법원에서 조합 간부 등 29명을 제외한 조합원들 64명이 복직 판결을 받았다.

복직하자마자 조회 시간에 공장장이 양순씨에게 느닷없이 구호를 외치라고 했다. 아무 설명도 없이 구호를 외치라고 하는 바람에 양순씨 입에서 저절로 지난 6년 동안 몸에 밴 구호가 나왔다. “가자 파주로!” 순간 공장장의 얼굴이 벌게지더니 파주 대신 사무실로 가라고 했다. 그때부터 양순씨는 텅 빈 책상 앞에 온종일 앉아 있어야 했다. “할 일이 없으니까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2주 만에 다시 현장으로 가라는 거예요. 나는 영어 공부를 더 하고 싶었는데. 하하하.” 이번에도 양순씨는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뒤 안산공장을 폐쇄하면서 2차 해고됐고, 법원 판결로 다시 복직했다가 3차로 해고된 게 2016년이다. 지난해 9월 다시 대법원에서 승소했으나 회사는 휴업 명령서만 보내왔을 뿐 아직 공장으로 부르지 않고 있다.

플루트를 배우지만

양순씨는 요즘 플루트를 배운다. “처음에는 호흡을 늘려보려고 시작했는데, 오히려 플루트를 불 때마다 호흡이 힘들어 죽겠어요. 하하하.”

지금도 양순씨는 파주공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울 논현동 영풍 본사와 종로 영풍문고 앞에서 ‘몸자보’(문구가 적힌 옷)를 입고 서 있다. 조만간 투쟁문화제에서 양순씨의 플루트 연주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아니, 그보다 먼저 다시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박일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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