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요.”
권남우(박형식)는 “무죄냐 유죄냐”를 결정하는 배심원 회의 자리에서 ‘다수의 적’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유죄’라고 했는데 권남우는 “모르겠다”고 한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들이 우물쭈물하는 권남우를 다그치자 결국 그는 이런 말을 내뱉는다. “싫어요”는 삐져서 하는 말과, 신념에 찬 자기주장의 중간쯤에 있다. 이 “싫어요”는 영화 (홍승완 감독)이 갖는 ‘블랙코미디’의 태도이자 한국 사회에 던지는 파문이다.
5월15일 개봉한 은 2008년 국민이 배심원이 되는 국민참여재판의 역사적인 첫 재판을 소재로 가져왔다. 존속살해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되고, 살해를 시인한 강두식에게 형량을 결정하는 것이 애초 배심원들의 할 일이었다. 하지만 강두식은 진술서가 강요에 의한 것이라며 무죄를 주장한다. 피고인은 그날 아파트 계단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하루분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간 터라, 본인도 자신의 행적을 알 수 없어 사건 상황 자체가 완전한 ‘블랙박스’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20살 이상의 사람이면 누구나 배심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관객도 배심원이 되어 영화를 봐주었으면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박장대소 속 ‘법과 죄의 무거움’ 성찰영화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법정 영화’이기도 하지만, 또 한국에서 보기 드문 ‘블랙코미디’이기도 하다. ‘법정 영화’가 성공 사례가 없던 한국에서 2010년대 들어 법정 두뇌 싸움을 벌이는 (2011)이 선전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을 극화한 (2013)이 1137만 관객으로 크게 성공하고, 전북 익산 약촌오거리 강도 사건을 영화화한 (2017)도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오히려 ‘블랙코미디’가 한국에서 드물다. 관객 동원에서 수위를 다투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블랙코미디지만, ‘블록버스터’라는 외피를 쓰지 않았을 때는 여전히 낯설다. 아는 관객만 웃는 ‘웃음의 코드화’는 대중영화에서는 큰 적이다. 그런데 법정 블랙코미디라는 ‘태생적 한계’를 안은 은 의외로 극장이 들썩거리게 웃는 포인트를 만들어낸다.
주요한 웃음 포인트는 배심원들 사이의 앙상블이다. 1번 김그림(백수장), 2번 양춘옥(김미경), 3번 조진식(윤경호), 4번 변상미(서정연), 5번 최영재(조한철), 6번 장기백(김홍파), 7번 오수정(조수향), 8번 권남우 등 번호로 불리는 배심원 8명은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물들이 만났을 때의 격돌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대의와 이기심, 원칙과 실제, 신념과 관습 등의 갈등 상황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것과 비슷해 생각거리가 많아진다. 오수정이 “그냥 집에 가고 싶어서 유죄로 한다면 다수의 폭력”이라 하고, 변상미가 “한 사람 때문에 다수가 무시되는 건 민주주의의 폭력”이라고 반응하는 대사 등. 결국 영화는 배심원이라는 제도를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 상황을 은유한다. 그들이 대변하는 이익은 ‘계급적’ 이익으로 치환된다.
홍승완 감독, 데뷔작서 노련한 연출무엇보다 영화가 코미디를 통해 설파하는 것은 ‘법적 정의’다. 영화는 배심원에게 ‘유죄가 50%, 무죄가 50%로 판단될 경우 그는 무죄인가 유죄인가’라고 묻는 데서 시작한다. 정답은 정해져 있다. “무죄.” 정답은 도덕 교과서처럼 현실에서도 무용하다. 영화는 상황을 끝없이 회의하는 것이 법이라고 한다. 일찌감치 부실한 수사와 검시에도 ‘답정너’(이미 답을 정해놓음) 관련 법조인들과 달리, 권남우는 결론을 내리는 것을 끝없이 미룬다. 시류에 휩쓸려 관습적인 판단을 하지 않는 “싫어요” 정신이 법의 정신이다. 그렇게 영화는 ‘법의 무거움’과 ‘죄의 무거움’을 실감하게 한다.
한국 법체계에 대한 문제의식도 블랙코미디 영화의 영향권 안에 있다. 영화는 마지막 자막에서 “배심원의 무죄율은 일반 재판의 3배에 이른다”고 적었다. 실제 한국 재판에서 무죄율은 매우 낮다(2017년 1심 무죄 선고율 0.71%, 2심 무죄 선고율 1.58%, 대검찰청 검찰통계시스템). 검사가 증거를 모아서 기소하는 형사절차법상 차이가 있지만 영미에서는 무죄선고율이 40%에 이른다.
배심원들은 ‘처음이라 잘하고 싶어서’ 현장검증하는 곳까지 간다. “처음이라 잘하고 싶었”던 것은 홍승완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첫 연출작에서 감독은 장영규의 영화음악과 맞아떨어지는 기묘한 리듬의 연출을 세련된 노련미로 완성했다.
실제 첫 국민참여재판과 비교해보니
영화보다 조용하고 짧았다
최초의 국민참여재판은 대구지법에서 2008년 2월13일 열렸다. 배심원단은 12명이고, 강도살해 재판이었다. 교통사고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저지른 범죄였다. 피의자는 사건을 저지른 뒤 피해자를 병원으로 데려가다가 주민의 신고로 붙잡혔다. 피고인은 범죄를 시인했지만, 피해자를 병원으로 데려가려 했다는 정상 참작할 수 있는 상황이 형량을 결정하는 데 관건이 되었다. 첫 재판이 열린 대구는 영화에서처럼 전국에서 기자들이 몰려와 북적였다.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상황을 생중계하는 등의 ‘소란’이 크지는 않았다. 첫 재판은 2시간 토론 끝에 끝났지만, 영화에서는 훨씬 더 긴 시간을 토론한다.
“재판의 최종 책임자는 당해 사건의 법관”이며 배심원의 결론은 ‘중요한 참조 의견’이지만, 실제 첫 국민참여재판에서는 ‘처음’이라는 의도를 살려, 배심원들이 내린 결론을 재판정도 받아들인다. 영화에서는 ‘심기’를 건드리던 배심원들이 내린 결론을, 판사가 받아들일지가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서울중앙지법에서 국민참여재판은 같은 해 6월17일 처음 열렸다. 영화가 모티브로 삼은 사건은 그해 12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어머니를 살해한 뒤 방화한 혐의로 기소된 아들의 재판이다. 사흘간의 심사숙고를 거쳐 배심원들은 살인에 대해 무죄로 결론 내렸다. 영화는 법정과 똑같이 만든 세트에서 촬영됐다. 눈 밝은 이에게는 햇빛이 들어오는 재판정이 특이하게 비칠 수 있다. 법정에 창문을 내고 싶었던 감독은, 수원지법 법정에 창문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법정 창문을 내도 된다는 개연성을 얻었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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