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중앙에 있는 커다란 탁자 위에 둘둘 말린 종이 꾸러미가 올라왔다. 본격적으로 인터뷰하기 전 그걸 조심스레 하나씩 펼쳐 보이며 설명이 이어졌다. 요즘 말로 캘리그래피라 하는, 작가 스스로는 ‘붓글’이라 하는 작품들이었다. 한자로 쓴 작품은 하나하나 해석해주고, 마치 잠언처럼 짧게 쓰인 문구는 배경을 설명해주었다. 그 10여 분 동안 ‘음악가’ 정태춘 대신 ‘붓글 작가’ 정태춘이 있었다.
그 안에는 언제나 ‘저 슬픈 고향’“15년쯤 됐을까. 세계화, 김영삼 정부부터 그런 흐름이 있었죠. 그게 세계적으로 대세가 되면서 과거 국가 단위의 자본주의가 국경을 초월하는 자본주의로 바뀌고, 그것들이 인간의 삶 양식 전반에 문명사적 변화를 일으키는 상황이었죠. 예술이든 철학이든 담론이든 시장에서 이윤가치를 가지지 못한 것은 모두 사라지는 상황 변화 속에, 내부적으로는 정권이 바뀌고 민주주의가 진척되면서 낙관적 전망이 우세했는데 난 그것에 동의하고 따라가기가 어려웠어요. 내 노래는 그런 시장에서 시장가치가 없다, 그러니 이제 창작을 접자고 생각한 거죠. 직접적으로는 그때 발표한 음반 두 장이 피드백이 없고 안 팔리고 하니까 계속 만들 수가 없었어요. 그럼 나는 시장에서 빠져나온다, 이 산업주의 신문명에는 같이 갈 수 없다, 뛰어내리자, 뛰어내리면서 엄살을 조금 섞어 다쳤다, 피가 좀 흐른다, 하면서 우울한 시간을 보낸 거죠.”
그는 기타를 치지 않고 노래를 부르지 않고 음악을 놓았다. 대신 사진을 찍고 가죽공예를 하고 한자 공부를 하고 붓글을 썼다. 그는 스스로를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사람이라 말했다. 삶이든 세상이든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사람인데, 과거엔 그게 노래를 통해 나왔다면 이제는 붓을 통해 나온다. ‘시마’(詩魔)라고 표현할 만큼 붓글에 빠져 노래 대신 텍스트로 표현하고 정제하고 조탁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
노래는 붓글로 바뀌었지만 그 안의 정서나 메시지는 여전하다. 붓으로 쓴 글씨 안에 그가 줄곧 노래해온 ‘저 슬픈 고향’이라는 그리움의 대상이 있고, 분노가 있고, 메시지가 있었다. “유년기·소년기 때 고향(경기도 평택)에서 봤던 들판과 바람과 큰 나무 하나 없는 겨울의 황량함, 서해 바다와 갯벌이 원체험처럼” 자리잡은 이가 만들어낸 예술은 표현 매체가 바뀌었을 뿐 그대로였다.
“사춘기 때 김민기나 서유석 같은 한국 초기 포크 음악을 많이 들었고, 그전엔 클래식에 심취했죠. 서울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형님이 사다준 클래식 전집 안의 이탈리아 가곡부터 오페라 아리아까지, 피아노·바이올린 소품부터 교향곡까지 클래식에 깊이 빠져들었어요. 또 시골 마을의 풍물, 평택이 풍물이 센 곳이거든요. 그런 풍물의 기억도 아주 밑바닥에 들어와 있었죠.”
정태춘이란 가수가 처음 등장하며 신선함을 주었던, 그리고 음반을 발표할수록 더욱 짙어졌던 ‘토속적’ 느낌은 이런 ‘원체험’에서 비롯됐다. 들판과 바람과 큰 나무 하나 없는 겨울의 황량함이 정서적 부분이었다면 한국 포크와 고전음악, 풍물은 음악적 자양분이 돼주었다. 시골에 살면서 들은 많은 구전 이야기도 그의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유년기 체험이 자신이 직접 겪은 건지 어린 시절 들은 이야기를 다 끌어와서 창작한 건지 헷갈려할 만큼 그때의 기억은 많은 부분을 지배했다.
새로운 가수의 등장을 모두가 반겼다. 허무함과 쓸쓸함이 가득 밴 가사는 아름다운 선율에 실려 전달됐고, 노래와 함께 자연스레 드러나는 토속적 정서는 정태춘이라는 신인가수를 우뚝 서게 했다. 첫 음반 《시인의 마을》(1978)은 가수 스스로 “상당한 성공” “대단한 출발”이라 할 만큼 큰 인기를 얻었다. 신인가수상과 작사상을 받을 만큼 단순한 인기 가수가 아니라 동시에 문학적이고 시적인 싱어송라이터라는 훈장까지 얻었다.
하지만 이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정태춘은 주류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시상대에 올라가면 당당하고 멋있게 연출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다 부족”했다. 인기라는 조명을 받으면서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불편한데’ 하며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징적인 예가 MBC 였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사람처럼 뛰고 구르고 밀가루 속에서 찹쌀떡을 찾아 먹어야 하는 프로그램에서 정태춘은 결코 명랑하지 못했다. 회사에선 ‘이거 조금만 하면 되는데’라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스케줄을 잡아왔지만 정태춘은 점점 시스템과 멀어지는 길을 택했다.
“당시엔 내가 결혼했음에도 상업적인 결과 같은 건 신경을 안 썼죠. 1집이 히트하면서 그 보상이 컸어요. 일단 먹고사는 데 문제없고 회사에서 생활비 대주고, 정말 행운아죠.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노래만 골라서 2, 3집에 담았는데 그걸 다 회사에서 받아줬어요. 그런데 두 음반 다 실패한 거죠.”
음악 역시 대중과 멀어졌다. 첫 음반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정태춘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2집과 3집에 담았지만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더 강해진 토속적 기운과 적극적으로 차용한 국악 요소를 대중은 외면했다. 뚜렷한 음악적 청사진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때그때 심취했던 관심사를 바로 음악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당시 그는 국악에 빠져 있어 자신의 음악에 반영했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생활고’가 눈앞에 다가왔다. 4년 전속 계약에 800만원이라는 형편없는 조건에 새로운 회사와 계약할 수밖에 없었다.
4·5집의 노래는 2·3집보다 덜 어둡고 덜 가라앉아 있었다. 부인 박은옥과 함께 부른 같은 ‘달콤한’ 노래가 다시 대중의 귀를 사로잡았다. 같은 노래가 다시 한번 정태춘·박은옥 부부를 대중 앞에 호출했다. 단순히 대중적인 성공만은 아니었다. 를 통해 들려주는 정태춘의 세계는 더욱 깊어져 있었다.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리”가 노래 안에 치열하게 자리했다. 하지만 개인의 고뇌는 여기까지였다. 시대는 민주화운동을 거쳐 1980년대 후반으로, 다시 1990년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나의 고민에서 사회의 고민으로“개인적 고뇌를 하던 시기가 있고, 실존을 고민할 때가 있고, 사회적 고민을 할 때가 있고, 난 그게 성장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비로소 어른으로, 한 시민으로 깨어났구나 생각하죠.”
1988년 발표한 음반 《무진 새 노래》에는 이 담겼다. 그는 노래의 의미와 쓰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의 노래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슬픈 환락과 전도된 가치 속에서”라는 후렴구를 통해 자신이 변하고 있음을,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알렸고, 1988년 겨울 청계 피복노조의 집회에 참여해 노래하면서 앞으로 더 많은 거리에서 노래할 것임을 알렸다. 란 제목의 노래극을 하며 전국을 돈 것도 같은 해였다. 왜 교과서에 실리는 동요에 ‘누렁송아지’가 아니라 ‘얼룩송아지’가 있느냐는 항의의 의미로 지은 제목처럼, 그는 한창 민족주의에 경도돼 있었다.
“가사가 심의에 걸리면 다시 수정하면서 수정 의견을 써서 올리고, 그러면 심의위원들은 반려하면서 반려 의견을 보내고, 그게 너무 반복되다보니 심의 당국의 사무국장과 친분이 생길 정도였어요. (웃음) ‘이러지 말고 정형이 직접 와서 심의위원들한테 한번 설명도 하시라’고 해서 심의실에 들어가면 잔소리가 쏟아져요. ‘노래를 꼭 이렇게 만들어야 합니까?’ ‘이런 얘기를 꼭 해야 합니까?’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사무국장이 옆방에 가서 같이 고치자고 얘기해요. 그런 실랑이를 거치며 미뤄놓고 미뤄놨던 노래들이 일부 《무진 새 노래》에 실렸죠.”
일부가 《무진 새 노래》에 실렸지만 검열의 가위질을 피해가진 못했다. 앞서 언급한 에서 “시영아파트”는 “후미진 아파트”로, “서울 변두리 검은 하천엔 썩은 물만 흐르고/ 역한 냄새 속에서 웃지도 않고 노는 애들”이란 가사는 “서울 변두리 학교 앞에는 앳된 병아리를 팔고/ 비닐봉지에 사 담아 집으로 돌아오는 애들”로 바뀌었다. 에서는 “문둥이”와 “미군부대”란 낱말이 들어 있단 이유로 노래의 한 절(節)이 통째로 들려나갔다. 로 데뷔한 때부터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가 “나는 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로 바뀌는 구원(舊怨·오래된 원한)이 있었다. 고독해서도 방황해서도 안 되는 시대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지만 변한 건 없었다. 《무진 새 노래》가 힘들게나마 일부 통과됐다면 《아, 대한민국》(1990)은 다 반려당하고 한 곡만이 통과됐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 그동안 쌓여온 심의에 대한 불만이 더해지면서 “이제 싸움이다”란 결행으로 이어졌다.
“오히려 많은 반대가 있었어요. 선배 작품자들 중에서도 ‘태춘아, 네가 잘 모르는 거야’ ‘네가 그러면 안 되는 거야’라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었고, 이 문제로 전화하면 전화를 아예 끊어버리는 경우도 있었어요. 불안한 싸움이었죠. 이길 수 있다는 확신도 없고. 내가 이렇게 해서 60년 된 제도가 무너지는 게 쉽지는 않다는 걸 알았고, 또 가요에 대한 정부의 간섭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게 당시엔 일반적인 생각이었어요. ‘모든 걸 다 놔두라는 거냐?’ ‘네 마음대로 하겠다는 거냐?’ 사실 이런 것들과의 싸움이었죠. 심의가 없어진다면 별 이상한 게 다 나올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러면 나는 별 이상한 게 다 나와야 한다고 말했죠. ‘너 이상한 노래 하려는 거잖아’ 이런 분위기였는데, 내가 그동안 부드러운 가사를 써왔다면 동조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세상에서 고립되는 기분이었죠.”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정태춘은 음악가로서 홀로 싸웠다. 사전심의 폐지 가능성이 적은 상황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불법’ 음반 두 장을 제작하고, 토론회에 나가고, 국회의원을 만나고, 국회로 문화체육관광부로 쫓아다니며 외롭고 지난한 싸움을 했다. 안타까운 건 기자회견장에 찾아온 강산에 정도를 빼고는 음악가 그 누구도 연대나 지지의 뜻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전심의 철폐 과정을 설명하며 반복한 “어려웠다”와 “힘들었다”는 말의 무게가 그대로 전달됐다. 지금 그 수혜는 모든 음악가가 받고 있다.
한 시대를 거치며 1990년대를 맞은 정태춘은 《92년 장마, 종로에서》와 《정동진/건너간다》를 발표한다. 각 음반의 대표곡인 와 에는 공통적으로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와 “휘청거리는 사람들 가득 태우고 이 고단한 세기를 지나간다”란 가사가 나온다. 또 두 음반에는 회한과 희망이 교차한다. 그에게 90년대는 그렇게 두 감정이 교차하는 애매한 시기였고, 90년대 후반엔 더 패색이 짙어지고 나빠지고 있었다.
“2000년대 접어들며 자본에 의한 차별이나 야만은 더 심해지고 그 과정에서 나의 완고함 같은 것이 대중에겐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좀더 섬세해지는 나의 미의식을 나만의 음악 방식으로 풀어보려는 시도도 시장에서 잘 안된 거죠. 시장은 대량소비를 위한 공장으로 바뀌는 큰 변화가 있었고. 그 상황에서 내가 같이 동의해 따라갈 수 없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어요. 시장의 변화를 예술을 파괴하는 무언가로 봤기 때문에 나는 그만두련다, 나는 다른 거 하고 싶다, 이렇게 된 거죠.”
지금껏 함께해준 사람들을 위해다시 얘기는 앞으로 돌아간다. 2000년대 들어 정태춘은 침묵했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인) 대추리 싸움으로 이름이 오르긴 했지만, 그는 “내가 나고 자란 고향 사람들의 문제에 대한 사적인 참여”라고 밝혔다. 그동안 사진 찍고 가죽공예 하고 한자 공부하고 붓글을 썼다. 정태춘·박은옥 부부가 함께 활동한 지 40년이 될 것을 기념해 올 한 해 많은 행사가 열린다. 그는 “민망하기도 하지만 나를 많이 도와주고 함께해준 사람들이 제안해, ‘그래, 올 한 해는 재미있게 놀아보자’고 마음먹었다. 3월부터 11월까지 콘서트, 음반, 출판, 전시, 학술, 아카이브(기록 보존), 트리뷰트(헌정) 프로그램이 전국에서 진행된다. 전시에 나올 붓글 가운데는 그런 민망함을 담은 “나를 시장에 내놨다. 나를 팔고 있다”는 글귀가 있다. ‘반산’(反産)이란 제목의 연작도 있었다. 그는 또 다른 방법으로 세상과 이야기하고 있다.
글 김학선 음악평론가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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