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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막눈의 말에 매료됐다”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 다룬 영화 <말모이>

엄유나 감독 인터뷰
등록 2019-01-19 15:08 수정 2020-05-03 04:29
류우종 기자

류우종 기자

<font size="2">*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font>

엉덩이와 궁둥이의 차이를 아는가. 사투리와 표준말? 국어사전에는 엄연히 다른 부위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궁둥이는 앉았을 때 의자에 닿는 부분을, 엉덩이는 그 윗부분을 뜻한다고 한다. 이 섬세한 한국어의 세계는 최초의 한국어 사전을 만드는 과정을 그린 영화 에 나온다.

영화 제목은 조선어학회의 ‘말모이 작전’에서 나왔다. 조선어학회는 잡지에 ‘전국의 말을 모아 주십시오’라는 광고를 내고 호소한다.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말’을 모았던 것이다. 최초의 사전을 만든다는 흥미진진한 소재는 엄혹한 상황과 더해져 역동적 이야기가 된다. 3·1운동의 기세에 놀라 문화정치를 펼치던 일제는 침략 전쟁을 본격화하면서, 조선인을 전시체제에 동원할 명분으로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뜻)를 강제했다. 조선말을 못 쓰게 하고, 이름 또한 일본식으로 고치라(창씨개명) 했다. 33명이 체포되고 그중 2명이 옥사한 ‘조선어학회 사건’ 때는 상황 속의 1942년이었다.

는 3·1운동 100주년인 2019년을 맞아 줄줄이 개봉 예정인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 중 첫 작품이다. 엄유나 감독은 이 작품이 첫 연출작이다. 역시 실화를 소재로 한 가 시나리오 데뷔작이자 영화 데뷔작이다. “경력이 한 줄”에서 “두 줄”로 늘어난 감독을 1월14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현실과 픽션(허구) 사이의 궁금증을 풀어보았다.

도 그렇고 도 그렇고 실제 이야기를 가공한 것이다.

그전에 쓴 시나리오는 장르도 다양하고, 소재도 다양했는데, 처음 영화화된 게 고, 영화를 만든 게 다. 학부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막내부터 시작해 오랫동안 연출부 생활을 했고, 시나리오 전공으로 대학원을 다녔다.

영화 <말모이>는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말에 주목한다. 소매치기에 까막눈인 판수는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의 사전 작업을 돕는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말모이>는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말에 주목한다. 소매치기에 까막눈인 판수는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의 사전 작업을 돕는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실화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판수(유해진)나 정환(윤계상)은 모두 가상의 인물이다.

영화 시나리오를 위해서 모두 만들었다.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이를 주인공으로 삼고 싶었다. 그래서 까막눈에 소매치기인 인물을 생각했다. 적어도 말의 재미를 아는 사람, 말을 맛깔스럽게 하는 인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유해진씨가 평범한 대사도 차지게 표현하는 사람이다. 머릿속에 유해진씨가 떠오르고 나니까 시나리오를 쓰는 데 도움이 되더라.

영화 속 사건도 역사 기록대로 흐르지 않는다. 여학생의 일기에서 “국어(일본어) 쓰지 말라” 했다는 조선어학회 친척의 말이 나오고 그걸 꼬투리 삼아 수사를 시작했다거나, 그 일기를 조사한 것 자체가 기획 수사의 귀결이었다거나, 버스에서 조선어를 쓰는 여학생을 수사하다 시작되었다 등 조선어학회 사건 전개에 관한 이야기가 여럿 있었지만, 영화는 전혀 다른 방향이다. 사전도 실제로는 전국의 사정위원 73명이 3년간의 회의를 거쳐서 원고를 다듬었는데, 이 과정이 영화에서는 클라이맥스를 위해 배치되었다.

영화의 가장 극적인 상황은 역사적 ‘사실’에서 왔다. “창고에서 원고가 발견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그게 사실이어서 무척 놀랐다는 관객이 많더라.” 고생 끝에 만들어진 사전 원고는 일제의 수사 과정에서 사라진다. 13년 공들인 원고가 사라지는 바람에 다시 작업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염려했다. 해방된 해 9월 조선통운 창고에서 발견된다. 마찬가지로 엄 감독을 붙든 것도 역사적 사실이 주는 묵직함이었다.

“시나리오를 들고 한글학회를 찾았을 때 실제 전국에서 ‘말모이’ 한 편지를 보았다.” 당시 조선에는 조선어학회의 광고에 따라 ‘방언 조사 수첩’을 들고 다니는 게 꽤나 ‘트렌드’였다 한다. “당시가 멀게 느껴졌는데 눈앞의 원고를 보니까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묵직한 감동이 느껴졌다.”

말을 만드는 과정에서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은데.

“저는 개새끼입니다”라는 대사를 쓰고 싶었다. 강아지, 강생이, 개새끼 중 여러 개의 말 표준어를 정할 때, 한 교사가 자신은 ‘개새끼’를 지지한다며 하는 말이다. 이건 픽션을 가미한 것이지만, 궁둥이와 엉덩이는 실제 기록에 나와 있는 대로다.

엄 감독이 강조하는 것은 ‘평범한 이들의 언어’다. 정환은 민들레가 ‘문 주위에 피는 흐드러지게 많은 꽃’이란 의미를 판수에게 알려주며,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크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들려준다. 표준말을 정하는 것에 ‘민주주의’ 원칙이, 저잣거리의 언어가, 사투리가 무슨 소용인가. 표준어란 ‘교양 있는 사람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어’가 아니던가. ‘반주시경 학파’ 홍기문은 “적어도 노농계급어를 표준어의 중심으로 삼지 안 하여서는 안 된다’라고 ‘표준어 제정에 대하여’에서 말한 바 있다. 사전이 만들어지던 때는 여러 결의 언어가 경합하는 현장이었다. 엉덩이, 궁둥이, 볼기가 정리되고, 가위-가새-강우-까새 등의 여러 사투리가 기록되고 경합했다. 엄 감독은 말한다.

“사적으로 평범한 많은 사람이 함께 뭔가를 이뤄내는 일이 많은 것 같다. 사전뿐만 아니라 일제 항쟁기의 무장투쟁, 독립투쟁도 마찬가지다. 영화 만드는 일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이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다.”

는 올해 처음 개봉한 여성 감독의 영화이기도 하다. 지난해엔 여성 감독의 영화가 10% 조금 넘게 개봉했다. 188편 중 22편이다. 여성 감독의 최고 흥행작은 (임순례 감독·2008년)으로 400만 명이 보았다. 는 유료 시사라는 변칙이 있었지만, 5일 만에 100만 명을 동원하고 1월16일까지 1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조선어학회에는 회원 중 여성이 있다는 기록은 없지만 감독은 구자영(김선영)을 창조해냈다.

현장은 여성 감독에게 가혹한가.

여자라서가 아니라 현장은 다 힘든 것 같다. 10여 년 전 연출부 할 때도, 이번에도 그랬다. 그러나 문제점은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영화사 대표도 여자분이었다. 여자 감독으로서 고민과 문제점이라기보다는 첫 영화라 신인 감독으로서 실수하지 않겠다는 긴장감이 있었다. 역사적 의미 등을 따지기보다는 편하게 봐주셨으면 좋겠다. 일단 재밌는 영화니까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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