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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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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으로 되살아난 하늘나라 복실이

애완견 초상화에 푹 빠진 점묘화가 김주철…

애완견 잃은 상처 그림으로 치유
등록 2018-09-22 17:52 수정 2020-05-03 04:29
김주철 화백이 2014년 완성한 ‘복실이’.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점묘화다.

김주철 화백이 2014년 완성한 ‘복실이’.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점묘화다.

애완견에게 유별난 애정을 쏟는 이들을 보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쌀보다 다섯 배나 비싼 사료는 기본이고, 연어와 쇠고기로 만든 간식에 수영장이 딸린 애견 호텔까지, 사람에게도 과분한 대접을 일개 동물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이유는 뭘까. 최근에는 애완견 장례를 ‘프리미엄급’으로 치러주는 이도 많다고 한다. 개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라나. 이들은 혹시 지구상에 절대 빈곤에 처한 인구가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건 아닐까.

애견가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는 지난여름 우연히 한 점의 ‘반려견 초상화’를 본 뒤 말끔히 사라졌다. 점묘화가로 널리 알려진 김주철 화백의 ‘복실이’라는 작품이다. 수만 개의 점으로 그린 복실이는 마치 실물을 대하는 듯했다. 손짓하면 금방이라도 꼬리를 흔들며 뛰쳐나올 것 같았다. 온순하고 붙임성 좋은 골든리트리버의 특성이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인물뿐 아니라 그 인품까지 그림에 담긴 명품 초상화를 보는 것 같았다.

한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복실이
김주철 화백이 9월10일 자신이 그린 애완견 첼시의 그림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주철 화백이 9월10일 자신이 그린 애완견 첼시의 그림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 작품에 얽힌 사연을 듣고 난 뒤 왜 애견가들이 애완견을 ‘반려견’이라 부르는지, 왜 진짜 가족을 대하듯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김 화백이 복실이를 만난 건 2014년 전북 전주시 한 카페에서였다. 카페 사장의 애완견이었던 복실이는 카페에서 손님맞이 구실을 톡톡히 했다. 손님이 들어오면 꼬리를 흔들며 다가가 ‘인사’했고 손님이 자리에 앉은 뒤에도 틈틈이 찾아가 애교를 부렸다. 김 화백은 복실이한테 첫눈에 반해버렸다. 복실이도 김 화백을 유독 잘 따랐다고 한다. 그는 복실이를 그림으로 그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즉석에서 스마트폰으로 사진 100여 장을 찍었다. 그는 경기도 분당에 있는 작업실로 돌아오자마자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을 추려낸 뒤 밑그림을 그렸다.

김 화백은 점묘법으로 그림을 그린다. 점묘법은 물감을 혼합하지 않고 캔버스에 원색의 점을 찍어 사물을 표현한다. 그래서 일반 회화보다 작품을 완성하는 데 시간이 많이 든다. 김 화백은 점의 크기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한 숨에 세 점을 찍은 뒤 숨을 내쉰다고 한다. 작업 시간이 길다보니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고된 노동에 가깝다. 하지만 복실이를 그리는 동안 김 화백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고 한다. ‘복실이’를 완성하는 데 3개월이 걸렸는데, 그의 다른 작품에 견줘 빨리 끝난 셈이다.

김 화백은 지난 4월 뉴욕에서 열린 아트엑스포에 다른 작품들과 함께 ‘복실이’도 출품했다. ‘복실이’는 단연 인기작이었다. 여성 관람객에게 더 인기가 많았다. 그 가운데 한 관람객이 전시 마지막 날에 4410달러(약 500만원)에 ‘복실이’를 사겠다고 했다. 그는 뉴욕의 한 방송사 기자였는데, 복실이를 보는 순간 ‘이 개는 뉴욕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김 화백은 그의 간절한 표정에서 작품에 대한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급 수단’이 말썽이었다. 신용카드 단말기를 미처 준비하지 못해 현지 갤러리에서 빌렸는데 그날따라 단말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전시실에서 작품을 철수하기 직전까지 카드를 단말기에 그어댔으나 소용이 없었다. 김 화백은 못내 아쉬워하는 관람객에게 “이 작품의 주인이 따로 있는 모양”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한 뒤 돌려보냈다. 김 화백은 “작품을 좋은 조건으로 팔 기회를 놓쳤는데도 별로 아쉽지 않았다. 아마도 내심 ‘복실이’를 팔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복실이 본 주인 우울증 사라져

하지만 ‘복실이’는 얼마 안 가 제 주인을 만났다. 김 화백은 뉴욕에서 돌아온 뒤 골프를 시작하기 위해 찾은 전주 시내의 한 골프연습장에서 복실이와 똑 닮은 골든리트리버를 봤다(전주에서 태어난 김 화백은 지난해 여름 고향으로 집을 옮겼다). 이 개는 골프연습장 주인의 애완견이었다. 그런데 주인을 본 김 화백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4년 전 김 화백이 복실이를 만난 카페의 사장이었다. 사장은 카페를 접은 뒤 이 골프연습장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었다. 골프연습장에 있는 골든리트리버는 복실이의 ‘손녀’였다.

김 화백은 사장에게 복실이의 ‘안부’부터 물었다. 사장은 “1년 전 저세상으로 떠났다”고 힘없이 말했다. 그는 복실이가 죽은 뒤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매사에 의욕이 떨어져 식사도 제대로 못한다고 했다. 복실이를 추모하기 위해 대형 애견카페까지 차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김 화백의 눈에도 그가 슬픔을 억누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확연하게 보였다. 김 화백은 ‘복실이’를 주인에게 주기로 결심했다. ‘복실이’를 영원히 소장하고 싶었지만, 복실이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복실이’를 본 사장은 복실이가 마치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듯 기뻐했다. 1년여 동안 그를 괴롭혔던 우울증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는 김 화백에게 골프연습장 ‘특별 회원권’으로 보답했다. 그러고는 김 화백도 ‘복실이’를 감상할 수 있도록 골프연습장에 작품을 걸어놓았다. 김 화백은 “내가 그림을 그린 이후 가장 보람 있는 순간 중 하나였다”고 회상했다.

‘복실이’ 사연을 알음알음 전해 들은 사람들로부터 애완견을 그려달라는 주문이 들어오고 있지만 김 화백은 내키지 않으면 정중히 사양한다. “그리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작품’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사물에 애정을 갖게 되면 그림이 훨씬 잘 그려진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작가와 교감하게 되면 훌륭한 작품으로 구현될 수 있다.

애완견 그림을 부탁하는 이들은 저마다 사연이 있다. 일본에 사는 한 지인은 뉴욕 아트엑스포에 전시된 ‘복실이’를 감상한 뒤 김 화백에게 자신의 애완견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김 화백의 부인이 일본의 한 보석상에서 일할 때 알고 지냈던 손님이다. 그도 애완견을 잃은 슬픔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새 애완견을 분양받긴 했지만, 앞서 애완견을 잃은 마음의 상처가 좀처럼 낫지 않았다. 그는 김 화백에게 죽은 애완견의 사진을 전자우편으로 보내왔다. 김 화백은 정성껏 그림을 그렸다. 실물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사진에만 의존해 그림을 그리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지인은 그림을 받아본 뒤 뛸 듯이 기뻐했다. 김 화백의 그림을 보고서 비로소 “애완견과 제대로 이별할 수 있게 됐다”며 고마워했다.

국제 미술시장에서 더 활발히 활동
김 화백이 작업실에서 애완견을 그리고 있다.

김 화백이 작업실에서 애완견을 그리고 있다.

김 화백은 국내보다 국외에서 더 유명한 작가다. 일찌감치 국제 미술시장에 눈을 뜬 덕분이다. 그는 10여 년 전부터 외국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국내에선 화가들이 그림에만 전념할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 영국 런던, 독일 베를린, 일본 도쿄 등 규모가 큰 미술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먼저 영어로 된 인터넷 누리집부터 만들었다. 한국에도 뛰어난 작가들이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노력은 얼마 안 가 작은 결실을 보았다. 런던의 유명 갤러리인 사치갤러리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아시아 현대 작가들을 발굴하기 위해 인터넷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으니 작품 3점만 인터넷에 올려달라 했다. 현지에서 반응이 좋으면 작품을 팔 수 있고, 원본이 아닌 복사본을 팔더라도 짭짤한 이익을 거둘 수 있는 조건이었다. 김 화백은 사치갤러리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사치갤러리의 인터넷 전시는 곧바로 세계 진출로 이어졌다. 뉴욕과 런던에서 공모전 참가 제안이 잇따랐다. 그는 세계 주요 도시의 유명 다리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전시했다. 뉴욕의 브루클린 다리와 런던의 타워브리지, 룩셈부르크의 아돌프 다리, 일본 요코하마의 베이브리지 등을 출품했다. “다리는 단절된 것을 연결해주는 소통을 의미하고, 역사와 문화 교류를 상징한다”는 작품 설명에 갤러리 관계자들의 호평이 쏟아졌다.

애완견 그림에 빠진 애견가

김 화백은 요즘 애완견 그림에 빠져 있다. 김 화백도 둘째가라면 서운할 정도로 유별난 애견가다. 5년 전 후배 작가한테서 생후 2개월 된 강아지를 분양받았다. 몰티즈와 화이트캐리어가 섞인 애완견이다. 김 화백은 강아지 이름을 ‘첼시’로 지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갤러리가 많이 모인 뉴욕 첼시를 동경하는 마음이 반영됐다.

사람들이 애완견을 많이 찾는 이유는 타인과의 소통을 갈망하기 때문은 아닐까. 애완견과 소통할 수 있다면 사람과 소통하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김 화백이 애완견 그림에 빠진 이유도 그가 ‘인간과의 소통’을 갈망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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