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대작들 사이에서 조용하지만 꿋꿋이 빛나는 독립영화 한 편이 있다. 박석영 감독의 이다. 한적한 시골마을에 사는 하담(정하담)이 엄마에게 버림받고 아빠를 찾기 위해 마을에 온 11살 소녀 해별(장해금)을 보듬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감독의 ‘꽃’ 시리즈 3부작을 완결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전작인 (2014)과 (2016)를 약간 언급할 필요가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스스로 자신을 지켜내는 아이들 </font></font>박석영 감독은 거리의 아이들을 주목해왔다. 의 주인공인 하담은 에서 버려지듯 길에 내몰린 가출 청소년이었다. 에선 곁을 내주지 않는 차가운 세상에 제 한 몸 붙여보겠다고 절박하게 분투하는 모습을 보인다. 상처 입고 피 흘리는 어린 짐승처럼 세상을 향해 으르렁거리던 하담이 “일하고 싶어요”라고 사회화된 언어로 자립을 호소하는 데까지 힘껏 나아갔다. 그런 하담이 에 이르러 어딘가에 정착한 것이다. 그것도 몹시 평온해 보이는 시골 풍경과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허름한 여관방과 재개발로 폐허가 된 빈집을 전전하던 하담이 이런 환경에서 지낸다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안심된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느 날 해별이 캐리어를 끌고 마을에 온다. 길에서 우연히 해별을 만난 하담은 해별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명호(박명훈)의 집까지 데려다준다. 하지만 당황한 명호는 하담에게 돈을 쥐어주고 해별을 떠맡긴다. 영화는 하담과 해별이 교감하는 이야기와 해별의 등장으로 연쇄적으로 요동치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두 축으로 진행된다.
영화에서 하담은 유독 해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간이 많다. 마을에서 맨 처음 해별을 발견한 사람도, 그의 처지를 누구보다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도 하담이다. 하담에게 해별은 육박해오는 세계와 같다. 자신의 조각난 일부처럼 해별을 받아들인다. 하담은 해별을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둘은 주로 나란히 앉거나 마주 보고 있다. 카메라는 미동도 없이 멀리서 그런 둘을 지켜본다. 과 에서 사용된 거칠고 투박한 클로즈업과 핸드헬드는 이 영화에서 찾기 힘들다. 어른들은 둘의 밀어를 들을 자격이 없다는 것처럼, 행여 다칠세라 서로의 마음을 배려하는 아이들의 제스처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폭력이라는 것처럼 먼발치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어떻게든 명호의 진짜 딸로 판명받아야 하는 해별을 향한 하담의 우울과 공포를 포착할 때 역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카메라는 하담의 표정을 확증할 자격이 없다는 듯이 군다. 은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풍부한 표정을 길어내는 영화다.
마을 어른들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존재다. 명호는 다혈질이지만 성실하고, 하담과 한집에 사는 철기(김태희)는 어딘가 한심하지만 착하고, 철기의 여자친구 진경(박현영)은 세상 물정에 훤하지만 생활인의 미덕을 갖춘 믿음직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어른’인 것은 아니다. 자신의 평온이 깨지면 숨겨둔 악의를 날카로운 칼처럼 들이민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들의 손을 놓아버린다. 마을은 영원히 아이들을 잃어버린다. 사실상 아직 어른도 아이도 아닌 하담만이 해별의 손을 굳게 잡는다. 하담은 해별을 공동체에 편입시키기 위해 생채기를 내는 길보다 다시 그 지난했던 길 위에 서는 편을 택한다. 어른들은 책임지려 하지 않고,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을 지켜내기 시작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배우와 카메라 사이 사려 깊은 시선</font></font>영화는 어른들의 심정을 살피는 것엔 인색하다. 그들에게도 불안과 좌절, 고충은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마을을 떠날 때 누군가는 미안해서 울고, 누군가는 후회로 가슴을 치고, 누군가는 아이들의 등이라도 한번 쓰다듬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분명 단 한 컷이라도 영화에 할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감독이 이런 컷을 굳이 담지 않은 것은 어른들의 자기변명이나 자기연민으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중요한 건 아이들의 깨진 마음을 보듬는 것이다. 속죄는 그렇게 간편히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은 때론 눈앞에서 펼쳐지는 연극처럼 느껴진다. 단출한 구성 때문이 아니라 인물들이 강렬한 생기를 뿜어내고 있어서다. 가령 하담이 어디론가 사라진 해별을 찾아다니는 장면에서 그는 달리고 또 달린다. 물리적 시간은 약 4분이지만, 체감으로는 한밤중 내내 아득하게 헤맨 것 같다. 거의 탈진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하담은 땅바닥에 한참을 엎드려 있다가 기어이 다시 일어선다. 이는 면밀히 약속된 움직임이 아닌, 어디까지나 배우의 리듬이고 호흡이다. 배우가 다음 행동을 취할 감정이 생길 때까지 영화가 잠자코 기다려주는 것이다. 이 장면에선 지금껏 고정돼 있던 카메라도 함께 달린다. 그래서 하담은 덜 외로워 보인다. 하담이 해별에게 자신의 탭슈즈를 신겨줄 때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물리적 시간은 고려하지 않는 듯 하담은 아주 천천히 정성스럽게 신발끈을 묶는다. 해별의 발보다 훨씬 큰 신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해별은 자신이 신고 있던 신발을 하담의 무방비한 맨발 앞에 쓱 밀어준다. 이것은 배우 정하담과 장해금이 만들어낸 장면이다. 리허설이나 계산이 아닌 그들의 마음이 자동 반응해 탄생시킨 순간이다. 영화에는 이렇게 내러티브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컷이 제법 있다. 예를 들어 철기의 엄마 삼순(정은경)이 혼자 툇마루에 앉아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리는 모습 등이다. 정서적인 컷을 통해 관객은 인물이 살아온 흔적을 더듬고 이 세계를 더욱 굳건한 것으로 믿게 된다. 은 영화 속 인물과 인물 사이, 영화 밖 배우와 배우 사이, 인물과 카메라 혹은 배우와 카메라 사이의 사려 깊은 시선이 켜켜이 쌓여 구축된 세계다. 언어로는 환원되기 힘든 고결한 ‘마음(들)’에 대한 영화인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모든 것이 탄 뒤 찾아오는 정화의 순간</font></font>마을을 떠날 때 하담은 뒤를 돌아본다. 자신이 숨차게 달려온 지난날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하담의 눈빛에 어떤 원망이나 서러움, 분노 같은 것이 없다. 전력을 다해 부딪힌 세상. 모든 것이 타서 사그라진 뒤 찾아오는 정화의 순간. 이것이 박석영 감독이 처절하게 관통해온 ‘꽃’ 시리즈를 마치며 우리에게 쥐어준 희망의 씨앗일 것이다.
김현민 영화저널리스트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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