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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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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퀸시리’를 제 맘대로 하려는 ‘정유로라’…

그로 인해 ‘근라임’의 7시간 비밀도 들통날 위기에 처하는데
등록 2016-12-02 20:30 수정 2020-05-03 04:28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영화관 관객이 줄었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11월1~12일 극장 관객 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18% 감소했다. TV만 켜면 영화보다 영화 같고, 드라마보다 드라마 같은 뉴스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막장 시국을 막장드라마로 그려보면 어떨까. 현직 드라마 작가가 드라마 기획안을 보내왔다. 작가는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너무 많은 인물이 너무 많은 사건을 벌여온 이 막장 시국은 픽션보다 더 거짓말 같았다고 한다. 선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고, 주인공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욕망으로 똘똘 뭉친 또 한 명의 주인공은 왜, 무엇 때문에, 이 사달을 냈는지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다. 대하막장드라마의 현실을 드라마 공식에조차 끼워맞추기 어려웠다는 후문이다. 가상의 드라마 기획안을 나눠 싣는다. _편집자

기획의도

2012년, 박근혜는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슬로건으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대통령이 됐다. 애초에 그녀가 “내 꿈”을 이루어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의 주인공은 당연히 ‘국민’일 거라고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그러나 얼마 전 그녀가 대국민 사과에서 한,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롭다”라는 인상적인 말을 포함해 지난 몇 년간 그녀의 화법을 보면, 이제는 누구나 저 말에서 “내 꿈”은 철저히 1인칭 시점으로, 그러니까 그녀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의 꿈이, 혹은 욕망이 무엇인지 나는 정확히 모른다. 전에는 알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그림자였던 ‘실세’가 앞으로 튀어나오자, 오히려 그녀가 희미한 그림자가 되었다. 이제 나는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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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의 주인공 ‘길라임’을 가명으로 쓴 것으로 보아, 그녀는 상당한 경지의 ‘드덕’이라는 건 알겠다. 그 이름을 당당히 자기 이름으로 쓴다는 건 보통 덕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런 그녀가 온 우주가 도와줄 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래서 우주가 내 혼을 비정상으로 만들었나보다. 내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를 진짜 써보면 어떻겠느냐는 말에 덜컥 그러겠다고 한 걸 보면.

이 드라마는 어쩌면 대하드라마, 어쩌면 사극, 어쩌면 미니시리즈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 가장 큰 구멍이 있다면, 주인공이라기에 존재감이 너무 미미한 ‘그녀’다. 자신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계속 이어보고 싶다면, 2014년 4월16일, 비어 있는 ‘세월호 7시간’ 동안 진짜로 뭘 했는지 혹은 누구랑 있었는지 그녀 스스로 말해주어야만 한다.

등장인물
막장드라마로 입길에 올랐던 MBC 드라마 <오로라 공주>를 패러디한 ‘유로라 공주’의 주인공 정윤해(왼쪽)와 정유로라. MBC 제공, 컴퓨터그래픽/ 최혜란

막장드라마로 입길에 올랐던 MBC 드라마 <오로라 공주>를 패러디한 ‘유로라 공주’의 주인공 정윤해(왼쪽)와 정유로라. MBC 제공, 컴퓨터그래픽/ 최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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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련의 공주, ‘근라임’

‘새마을 왕국’의 적통 공주. 청순가련(했던) 외모에 TPO(시간(time), 장소(place), 경우(occasion)에 따라 옷을 달리 착용하는 센스) 따위 가볍게 무시하는 과감한 패션 감각, 일관성 있는 헤어스타일로 팬클럽에선 선망의 대상이 되어왔다. 자기관리가 철저하고 수줍은 성격이라,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질문을 받거나 갑자기 외부 일정을 잡는 걸 가장 싫어하며, 일찌감치 항상 수첩을 가지고 다니며 메모하는 좋은 습관을 들였다.

나라 걱정에 불면증이 심해,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이를 치유하려 애쓴다. 해외에서 새마을 왕국의 위상을 보여주기 위해 외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 5개국 언어에 능통(하다고)하나, 공부에 쏟은 시간이 지나치게 많았는지 한국어는 조금 (많이) 서툴다.

저녁 시간에 TV를 보는 것이 외로운 그녀의 유일한 낙이다. 사실은 드라마를 본방 사수하는 덕후지만, 대외적으로는 어학 프로그램과 동물 다큐를 즐겨 본다고 대답한다. 어학 프로그램이야 그렇다 치고, 동물 다큐는 왜 좋아하냐고 물으면 ‘동물은 배신하지 않으니까요’라고 촉촉한 눈빛으로 대답한다. 그러면 누구나 그녀의 20대, 그녀를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만든 ‘그 사건’을 떠올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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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건’,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그녀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세상에서 기댈 곳이 아무 데도 없었을 때, 어머니의 따뜻함을 지니고 다가와줬던 그 남자, 최봉구와 그의 딸 시리 외에는.

최봉구는 죽었고, 이제 남은 건 시리뿐이다. 그녀를 다시 공주로 되돌려놓는 것도, 그녀의 재산을 불려주는 것도, 다 시리가 해냈다, 고 그녀는 생각한다. 이렇게 순수한 우정은 세상에 없을 거야, 라고. 그래서 시리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랐고, 무슨 일이든 시리와 의논했다. 시리가 해달라는 일은 직접 나서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점점 알게 됐다. 시리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시리의 딸 ‘유로라’를 공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을 움직였음을. 그러나 이제 그녀 없이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그녀가 곁을 떠난다는 생각만 해도 두려워져버렸다. 이제 어찌해야 하나…. 그녀는 크나큰 자괴감을 느끼는데….

해맑은 공주, ‘정유로라’

‘새마을 왕국’의 국가대표 승마선수. 근라임이 과거의 트라우마를 가슴 깊이 간직한 채 홀로 성에 틀어박힌 비련의 공주라면, 정유로라는 원하는 건 못 가져본 적 없고, 세상 두려울 게 하나도 없는, 참 해맑게 안하무인인 공주다.

그녀 나이 8살 때, 엄마와 함께 갔던 서울 강남의 목욕탕에서 나이 한참 많은 세신사의 따귀를 때렸다. 이유는 이제 기억나지도 않는다. 다만 그때 한참 어린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뭐든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던 그 마음은 기억난다.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비싼 말을 사줬다. 아니, 새마을 왕국의 제일가는 부자가 엄마에게 말을 사다 바쳤다. 그 말을 타고 못 갈 곳이 없었다. 명문 고등학교에도 그 말을 타고 들어가고, 국가대표가 됐고, 금메달을 땄고, 대회에서 입었던 선수단복을 입고 금메달을 목에 건 채 명문 여대에도 그 말을 타고 들어갔다.

실력 따위 키우지 않아도 된다. 실력과 상관없이, 지는 건 못 참는다. 대회에서 처음 2위 하던 날, 그녀는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엄마는 말했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없애면 되는 거야. 그럴 수 없으면 대회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면 되는 거고. 그 대회의 심판과 주최 쪽은 경찰 조사를 받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뭐든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구나.

그러나 그녀가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있었다. 엄마. 그녀는 열아홉 나이에, 사랑에 빠졌다. 가난하지만 그녀에게 정성을 다하는 남자였다. 공주를 알아볼 줄 아는 남자였다. 엄마가 막말을 하고 용돈을 바닥에 던지면 말없이 줍는 그 남자를, 그녀는 정말로 사랑했다. 그녀를 돌보듯 그녀의 말까지 돌봐주는 그 남자를.

집을 나와 그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다. 엄마는 조폭을 불러 남자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녀는 보란 듯이 아이를 가졌다. 결국 엄마도 내 맘대로 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남자와 아이와 함께 살면서도, 엄마는 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상속 포기 각서까지 썼지만 그녀는 여전히 엄마의 돈이, 엄마의 힘이 필요했다. 엄마를 어떻게 하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그녀는 난생처음,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진짜 여왕, ‘퀸시리’

‘새마을 왕국’을 수렴청정하는 어둠 속 진짜 실세. 변방의 종교 ‘영생교’ 교주였다가 목사가 된 최봉구의 3남6녀 중 다섯째 딸이다. 아버지는 왕비가 죽은 뒤 실의에 빠진 근라임 공주에게 다가가 신뢰를 쌓았고, 그녀 역시 둘도 없는 ‘순수한 우정’을 쌓았다. 근라임이 헤어스타일에 집착하듯, 퀸시리는 선글라스에 집착한다.

취미는 근라임 공주의 연설문 고치기. 자기가 하는 말이면 마땅히 누구에게나 통해야 한다. 안 통하면 상대 잘못이지. 같은 맥락으로, 해외 어느 곳에 나가도 김치 없이는 밥을 먹지 못한다. 레스토랑에서 김치를 만들 수 있든 없든, 자기가 원하면 김치를 가져와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근라임이 계속 비련의 공주로 남아 있는 한, 다른 사람들에게서 고립돼 있는 한, 근라임과 새마을 왕국은 자신의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굳이 사람들 앞에 서서 고된 역할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전히 어둠 속에 잠긴 채로도, 자신의 딸을 공주로 키워낼 수 있다고. 실체가 없는 그림자인 편이, 어떤 일에도 책임질 필요가 없으니 훨씬 좋은 거라고.

그런데… 근라임의 고분고분함에 익숙해져 있던 퀸시리, 천방지축 유로라가 사고 치는 걸 감당할 수가 없다! 급기야 가장 숨기고 싶던 비밀이 유로라에 의해 밝혀질 위기에 처하는데!

정윤해

퀸시리의 전남편이자 유로라의 아버지. 부인 시리와는 이혼했지만, 시리의 안하무인 태도를 똑닮은 딸 유로라는 몹시 아낀다. 한때 항공승무원이었던 그는 시리와 어릴 적 알고 지내다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근라임과 긴밀한 관계라는 소문도 있으나 상황이 단순하진 않다. 한때 새마을 왕국의 진짜 권력자라고 알려진 적도 있다. 그와 근라임의 인연은 40여 년 전부터 이어져왔다. 비련의 공주, 근라임 뒤에서 그림자처럼 일해왔지만 그와 관련된 많은 일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유로라가 퀸시리를 자기 뜻대로 하기 위해 밝혀내려고 하는 2014년 4월16일 7시간의 키를 그가 쥐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김순득(필명) 드라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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