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즐겨야 이긴다

길어지는 하야 정국, ‘순실증’ 극복하는 웃음공격

<예언자일보>, 장수풍뎅이연구회, 그리고 차벽을 넘는 상상력
등록 2016-11-29 17:22 수정 2020-05-03 04:28

“박근혜가 하야했습니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하는 시민이 고개를 돌렸다. “미래에서 왔습니다!” 지난 11월12일 서울 중구 광화문광장 주변에서 몇몇 청년들이 신문을 나눠주며 외쳤다. “미래에서 온 예언자일보입니다!” “박근혜가 하야했습니다. 우리는 그 이후를 생각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란 사실에 살짝 실망한 시민도 있지만 대개는 웃으며 신문을 받았다.
‘하야했다 치고’, 손을 흔드는 박근혜 대통령 사진에 위의 헤드라인은 단호하게 선언한다. ‘그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한 예언력 넘치는 기사 제목은 ‘육아, 가사에 이어 학업도 노동으로 인정되나?’ ‘제주 강정 해군기지 전면 철회’ ‘아이돌 노조 최초 결성’ 등으로 이어진다. 굿뉴스의 뒷면은 ‘청와대가 당신의 엉덩이를 응원합니다’라는 글귀가 붙은 청와대 사진이다. ‘바닥에 깔고 앉으세요’라는 작은 글씨의 친절도 괄호 안에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웃음공격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font></font>

<예언자일보>는 ‘박근혜 이후’를 예언하는 미래에서 온 신문이다. 예언자일보 제공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예언자일보>는 ‘박근혜 이후’를 예언하는 미래에서 온 신문이다. 예언자일보 제공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집회, 시위의 패러다임이 바뀌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편집진 이지민씨가 말했다. “몇 년간 꾸준히 집회에 나간 사람들인데, 중앙집권적인 시위 패러다임이 성과를 끌어내지 못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의 ‘예언자일보’를 패러디한 제목은 편집진이 생각한 시국의 방향을 담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하야가 끝이 아니고 하야 이후의 세상, 더 많은 민주주의를 생각하자”는 것이다. 상상만 했는데 행동을 해보니 성취감이 컸다. 이지민씨는 “‘하야했다!’고 외치니 정말 될 거란 확신이 들었다”고 돌이켰다. “집회는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 재미있어야 계속 나오고 싶다”고 덧붙였다.

캐도 캐도 끝이 없는 국정 농단, 갈수록 더해지는 청와대의 후안무치, “어이가 없네”의 세월이 한 달, 두 달 흐르고 있다. 한반도에 퍼지는 한파와 함께 최순실의 국정 농단 사태로 생긴 국민의 분노와 허탈감을 뜻하는 ‘순실증’ 증세에 감염될 우려도 커졌다. 지지율 4%, 사퇴 여론 74%에도 아랑곳없는 대통령에 “내가 이러려고 광화문 나갔나”라는 자괴감이 들지만 ‘지치면 지고, 미쳐야 이긴다’는 다짐으로 버틴다.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비서 (스르자 포포비치 지음)에는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의 말이 인용돼 있다. “인류에게는 의문의 여지 없이 정말 효과적인 무기가 하나 있다. 바로 웃음이다.” “웃음공격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세계의 비폭력 직접행동 사례를 나름 두루 섭렵한 이용석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는 “풍자에 관해선 한국이 세계 최고”라고 감히 단언한다. 둘째가라면 서러운 풍유의 민족에게 떡밥마저 끝없으니 풍자가 넘친다. 마장마술 쇼쇼쇼, 최순실 의상 패러디, 길라임 코스프레, 자괴감 넘치는 대통령 성대모사 등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동영상, 사진이 ‘웃픈’ 시절의 위안이다. 세상의 모든 패러디, 촌철살인의 풍자가 난무했던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넘어서는 유머의 풍년이다.

의미 없음의 의미 있음을 의미하는 깃발들의 잔치다. 광화문에 등장한 ‘장수풍뎅이연구회’ 깃발을 보고서 ‘저것은 무엇?’이라는 궁금증이 퍼졌다. 폭발적인 반응에 이들은 트위터에 ‘왜 장수풍뎅이연구회인가?’라는 해명을 올렸다. 청와대의 7시간 해명보다 100만 배 빠르고 명쾌했다.

“사실 저는 벌레를 만지지도 못합니다. 우리 모임이 집회에 참석하면서 기존의 올드한 방식을 지양하고, 좀더 친근하게 다가가는 방법으로, 부유하는 기표로 모임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려 했습니다.” 이어진 ‘깃발이 너무 귀여워요’에 대한 답은 경고한다. “그 밑에 서 있는 사람들 보시면 생각이 바뀔 겁니다.”

‘장수풍뎅이연구회’와 ‘얼룩말연구회’ 깃발의 역사적 만남을 목격한 이들의 ‘벅찬 후기’도 트위터에 올라왔다. 고양이가 그려진 민주묘총, 앰네스티(Amnesty·국제사면위원회)를 패러디한 햄네스티(Hamnesty) 등 평범한 시민이자 덕후들을 상징하는 깃발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안남시민연대’ 깃발 아래 모인 이들도 주목을 끌었다. 부패한 권력의 내부자 모두를 깡그리 죽이는 영화 의 팬들이다. 이들은 영화 속 가상 도시 시민으로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나라를 바꾸는 약자들</font></font>
11월19일 이강훈 작가가 기획한 ‘차벽을 꽃벽으로’ 퍼포먼스에 참가한 시민이 경찰 차벽에 꽃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류우종 기자

11월19일 이강훈 작가가 기획한 ‘차벽을 꽃벽으로’ 퍼포먼스에 참가한 시민이 경찰 차벽에 꽃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류우종 기자

일찍이 (최세진 지음)라는 제목의 책도 있었다. 여성, 청소년, 성소수자, 장애인 등을 배제하는 집회는 모두의 축제가 아니다. ‘억울하다’ 웅크리지 않고 ‘주인이다’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나라를 바꾸는 ○○○’ 스티커를 만든 갈라파고스는 “저희는 매주 토요일 현 정권의 부패에 맞서는 ‘평화집회’에서 어떤 평화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집회 내부에서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매우 일상적인 폭력들”에 저항하고, “종종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고 마는 정체성들”을 드러내기 위해 검은 스티커를 만들었다. ‘나라를 바꾸는 가난뱅이’ ‘나라를 바꾸는 페미’ ‘나라를 바꾸는 퀴어’ 등 목소리 없는 이들의 이름이 ○○○을 채운다.

하야 정국 초기에 에리카 체노워스·마리아 스테판이 쓴 책 (Why Civil Resistance Works)에 나오는 ‘3.5%의 법칙’이 주목을 끌었다. 전세계 저항운동을 분석한 결과 국민의 3.5%(180만여 명)가 지속적으로 참여한 비폭력 사회운동이 폭력적인 사회운동보다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참여할 의미와 재미를 만들어야 ‘순실증’이 극복된다. 타자를 배제하지 않는 ‘나의 혁명’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작되고 서로를 자극한다.

18년 동안 일러스트 작업을 해온 이강훈 미술 작가의 ‘차벽을 꽃벽으로’ 프로젝트도 화제를 모았다. 지난 11월19일 경찰 차벽에 꽃 스티커를 붙이는 퍼포먼스였다. 스티커를 떼는 시민들도 있어 더욱 주목을 끌었다.

이강훈 작가는 “평화적 위법이 콘셉트”라고 말했다. 그는 “언제부턴가 집회에 가면 소극적, 평화적 시위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갇혔다”며 “(경찰차에 스티커를 붙이는 행위도 위법이라면 위법인데) 위법, 범법이 반드시 폭력적이지 않다는 것을 경험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작업을 통해 합법과 위법의 아이러니를 드러낸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넘느냐 마느냐’ 넘어선 상상력</font></font>

이강훈 작가는 “부모가 아이와 함께 차벽에 스티커 붙이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경험이 아이들 마음에 자연스럽게 새겨지고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작업이 ‘자극’이 되기를 바란다. “나의 작업이 촉매가 돼 다양한 상상과 실천이 등장하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그의 작업은 ‘불완전한 평화’를 드러내고, 차벽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 되는 순간이다. 작은 시도가 얽히고 얽혀 거대한 변화가 된다. 다음은 당신 차례다.

신윤동욱기자 syuk@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font color="#C21A1A">http://bit.ly/1HZ0DmD</font>
카톡 선물하기▶ <font color="#C21A1A">http://bit.ly/1UELpok</font>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