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에는 ‘여주인공 친구’라는 역할이 있다. 대개 주인공의 지지자나 대변자에 가까운 역할로, 독립적 서사 없이 주인공의 서사에 종속된 이들이다. 물론 남주인공 곁에도 이런 감초 같은 친구는 존재한다. 문제는 기본적으로 ‘호모 소셜’한 사회에서 남주인공은 다양한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데 비해, 여주인공의 관계성은 극히 제한적으로 그려진다는 데 있다. 같은 종속적 역할이어도 ‘남주인공 친구’는 폭넓은 관계의 일부처럼 보이는 반면, 여주인공과 그 친구는 거의 유일한 유대관계처럼 비칠 때가 많다. 말하자면 ‘여주인공 친구’는 드라마가 여성의 사회적 관계를 얼마나 협소하게 그리는지를 드러내는 지표다.
JTBC 금·토 드라마 가 인상적인 것은 이처럼 국내 드라마에서 보기 어려운 여성들의 다양한 유대관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남성의 전유물처럼 인식돼온 의리와 연대의 서사를 같은 여성공동체 이야기로 그려낸 국내 ‘칙릿’(Chick-lit) 드라마의 여성주의를 이어가면서도, 우정과 자매애보다 더욱 다채로운 관계 묘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진화한 드라마다.
주인공은 셰어하우스 ‘벨에포크’에 거주하는 진명(한예리), 이나(류화영), 지원(박은빈), 예은(한승연), 은재(박혜수) 등 다섯 여성이다. ‘하우스메이트’로 지칭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타인으로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누군가 아플 때는 친절하게 간호해주고 마음이 다쳤을 때는 따뜻하게 안아주기도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들은 한국 드라마 여주인공에게 쉽게 발동되는 ‘정’이라는 이름의 오지랖을 내세워 서로의 삶에 깊이 관여하려 들지 않는다. 가령 ‘생존’이 당면 과제인 가난한 진명의 이야기는 연애나 진로가 고민인 다른 네 명의 삶과 유리된 채 이어질 때가 많다.
같은 집에 사는 또래 여성들을 유사가족공동체가 아니라 지켜야 할 규칙과 경계가 있는 생활공동체로 묘사하면서, 는 좀더 현실적이고 풍부한 여성 관계를 보여준다. 대표적 사례가 진명과 이나의 관계 묘사다. 이들은 성격, 외모, 환경, 전공 등 어느 것 하나 공통점 없는 하우스메이트들 가운데서도 극히 대조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진명은 젊음과 미모를 내세워 쉽게 돈을 버는 이나를 경멸하고, 이나는 궁핍하고 처절한 진명을 멸시한다. 드라마는 너무도 다른 이들이 결국 서로의 삶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섬세한 심리 묘사로 설득한다.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는 자신과 달리 너무도 열심히 사는 진명을 부러워했던 이나의 진심이 “내 질투에선 썩은 냄새가 난다”는 내레이션으로 드러나는 순간과 “나에겐 그저 너만큼의 유혹이 없었던 것뿐”이라며 이나를 받아들이는 진명의 변화는 이 드라마의 미덕을 가장 잘 드러낸다. 이것은 완전한 타인인 동시에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한 존재로서 여성들의 드라마다. 요컨대 는 여성공동체 이야기를 전형적인 자매애 판타지 안에 가두지 않으면서 한층 입체적인 유대의 드라마로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김선영 TV평론가*김선영 평론가의 ‘TV’칼럼 연재를 마칩니다. 좋은 글 보내주신 필자와 칼럼을 아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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