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엔 애들도 데리고 가라.
‘제주에서 한 달 살기’가 막 시작됐을 때 아이들을 데리고 섬으로 온 한 어머니를 인터뷰한 일이 있었다. 도시에서 아이들이 얼마나 학원과 사교육으로 꽉 찬 하루를 보냈는지 설명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거기 살면 어쩔 수 없어요. 아마 돌아가면 또 그렇게 살아야 할 거예요.” 또 다른 어머니에게서 자기 아이가 이 프로그램을 다 수행하면 탈진 상태에 이를 수밖에 없으므로 미리 심리상담을 주 1회 받도록 프로그램을 짰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받은 일이 있다. 부모만 나무랄 수는 없다. 아이들은 사회의 법칙에 따라 자란다.
독일 심리학자 미하엘 슐테-마르크보르트는 (문학동네 펴냄)에서 “오늘날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삶의 모든 영역을 측정하고 평가하는 경제화를 경험하며… 그 결과 점점 어린 나이에 번아웃되고 있다”고 경고한다. 번아웃은 병원에서 나오는 진단이면서도 사회적 현상이다. 주어진 일과 요구를 더 이상 극복할 수 없을 때 수면장애, 식욕장애, 자기회의, 탈진, 감정기복 등을 보이는 환자들에 대한 오래된 진단이기도 하고 사회적으론 탈진 우울증을 호소하는 어린이가 많다는 것은 아동기가 변하고 있다는 신호기도 하다.
‘번아웃’이란 소진 상태는 1974년 미국 정신과 의사 허버트 프로이덴버거가 자신을 진단하고 정신의학에 도입한 개념이다. 외부 상황에 따라 생겨난 반응성 우울증의 일종으로 성과 달성 압박이나 사회적 소통 문제가 커질수록 심리적 이상을 겪는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에 다분히 사회적 소인이 있는 병증이다. 독일에서 18살 이하 인구 22%가 심리적 이상을 보이며 그중 번아웃은 3% 정도로 추산된다. 겉으로 보기엔 다른 우울증과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동에 대해서는 아예 번아웃으로 진단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증가 속도가 무섭다.
책에서 주목하는 건, 번아웃이 정신분열증이나 내인성 우울증, 자폐증과 달리 막을 수 있는 질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사 직장처럼 변해가는 학교, 압박에 시달리는 부모는 아이들에게 번아웃을 물려주고 강화한다. 가족 모두가 과로와 불만족을 겪는 환경에서 ‘타버린 마음’은 일찍부터 찾아온다. 독일과 한국 아이 모두 학습·음악·체육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쫓아야 한다. 왜 성인에게나 가능한 번아웃증후군이 이토록 일찍 찾아오는지 궁금해하던 지은이는 가족의 분열, 훌륭해져야 한다는 과다한 책무, 불안한 미래 등에서 원인을 발견하다가 마침내 ‘성과주의’라는 가장 중요하고 커다란 원인을 발견해낸다.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책에서 제안한 것은 ‘포기하는 용기’다. 아이에게 좀더 쉬운 세상을 마련해주지 못했다는 것을 자각한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섬으로 갈 수밖에 없다.
남은주 문화부 기자 mifoco@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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