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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에 반대하여

1943년 위안부 ‘피해자’ 소녀, 1944년 홀로코스트 희생자 소년… <귀향> <사울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 ‘걸림돌’로 세워진 영화들
등록 2016-03-17 21:43 수정 2020-05-03 04:28
<귀향>의 흥행은 소녀들의 희생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이 모인 결과다. 다시는 비극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귀향>의 흥행은 소녀들의 희생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이 모인 결과다. 다시는 비극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지옥에서 사라져간 소녀와 소년이 관객을 움직이고 있다. 의 14~15살 소녀들은 일본군의 짐승 같은 짓에 불귀의 객이 됐고, 의 소년은 ‘토막’으로 불리며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일본군과 나치는 위안부와 유대인을 ‘소각’했다. 수많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불에 태워졌고, 60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은 가스실에서 살해돼 한 줌의 재가 된 채 강가에 뿌려졌다.

의 조정래 감독과 의 라즐로 네메스 감독은, 각각 씻김굿과 유대교의 전통 장례를 통해 소녀와 소년의 넋을 위로하고 치유한다.

은 이 시각에 도착하기까지 14년이 걸렸다. 조정래 감독은 불타고 있던 소녀들이 하늘로 올라가 날아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꿈을 꾼 뒤부터 영화에 매달렸다. 투자자에게 문전박대를 당해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군의 만행에 희생된 위안부의 넋을 씻김굿으로 위로하려 했다. 7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발적 후원으로 굿판을 벌였고, 300만 명 이상의 관객이 굿판에 동참했다. 희생자들의 넋은 나비가 되어 조국의 산하를 날아다닌다. 국민의 자성과 참여와 홍보로 개봉한 역대 최초 영화로 기록될 을 관람하는 것은, 감독의 말처럼 위안부 피해 할머니 한분 한분의 영혼을 고향으로 모시는 일이다.

헝가리의 신인 라즐로 네메스 감독도 에서 수많은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비극을 다룬다. 나치의 만행이 극에 달했던 1944년, 시체처리반 ‘존더코만도’ 소속의 사울(게자 뢰리히)은 어느 날 한 소년을 발견한다. 동료들에겐 아들이라고 주장하지만 그에겐 아들이 없다. 사울은 유대교 전통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죽음을 무릅써가며 시체를 숨기고 랍비를 찾아나선다.

카메라는 사울의 시점으로만 움직인다. 관객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울만 따라다니게 된다. 제한적 공간의 느낌을 주는 4:3 화면 비율과 감성적 울림을 주는 35mm 필름으로 관객을 비극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사울은 왜 그토록 장례에 집착했을까. 자신의 아들도 아닌 소년을 위해 왜 목숨을 걸었을까. 사울은 인간의 비인간성이 극한에 달한 죽음의 공장에서 단 한 명이라도 장례를 제대로 치름으로써 죽은 자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이 인간으로 마땅히 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라스트신의 총소리 못지않게 이 영화의 오프닝신은 전율을 안긴다. 첫 장면은 초점이 나갔다. 희미한 화면은 사울이 카메라를 향해 걸어 들어오는 순간, 선명해진다. 이 장면은 “당신들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잊고 있다. 사울을 통해 지옥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를 보여주겠다. 당신들은 꼭 기억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이 영화가 지난 2월28일(현지시각) 열린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자 “1993년 이후 이런 영화가 나오기까지 20여 년이 흘렀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1943년 전장에서 짓밟혔던 소녀와 1944년 가스실에서 숨을 거둔 소년을 우리는 잊고 지냈다.

두 감독은 제의를 통해 역사의 망각과 맞서 싸웠다. 죽은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은 가장 신성하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행위다. 제의는 ‘인간다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서경식 교수는 (한겨레출판사, 2007)에서 독일 거리에 있는 ‘걸림돌’ 이야기를 들려준다. 독일엔 길거리와 주택 현관 앞 여기저기에 네모난 금속판이 박혀 있다. 그 판에는 나치 시절 그곳에서 살다 수용소로 잡혀간 유대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과 이송 날짜, 그리고 죽은 날짜가 새겨 있다. “그 돌에 걸려본 사람은 누구라도 과거의 역사와 현재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 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걸림돌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스스로 걸림돌이 될 때, 역사의 비극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곽명동 객원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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