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다룬 영화 의 관객 수가 개봉 3주 만에 300만 명을 넘었다. 이 영화는 여러 힘이 모여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고통 속에서도 이 문제를 세상에 알려온 피해자분들의 호소가 영화를 만든 절박한 이유가 되었다. 여기에 영화 제작을 포기하지 않았던 조정래 감독과 배우·스태프들의 간절함이 더해졌고, 영화가 주저앉으려 할 때마다 시민의 후원이 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이 영화 뒤편에서 힘을 보탠 음악인들이 있다.
“저한테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우리의 히트곡은 하나도 없지만, 마치 히트곡 하나를 낸 기분입니다.”
그룹 ‘밴드죠’의 리더 배철씨는 이 많은 관객과 만나고 있는 것을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밴드죠에서 건반을 치는 김영미씨는 “(을 위해) 한 것도 없는데 주변 분들이 (우리한테까지) 수고했다고 인사를 해주신다”며 제작진에게 고마워했다.
“우린 한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배철씨가 조정래 감독을 본 것은 2013년 말이었다. 조 감독을 알고 있던 그룹 ‘레드로우’의 보컬 ‘고니’(예명)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그날 조 감독은 이 어떤 영화인지를 얘기했고, 배철씨는 투자자를 만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을 알리기 위해 후원콘서트를 구상했지만 당장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결심을 굳히게 만든 건 2014년 가을 의 제작발표회에 공연하러 갔다가 본 영상이었다.
“조정래 감독이 (을 소개하려고) 만든 영상을 보는데 목이 메일 정도로 울컥했어요. (피해자) 할머니께서 ‘증인이 이렇게 살아 있는데 증거가 없다고 하느냐, 우리 죽고 나면 누구에게 (사과)하려고 하느냐’고 하시는데 그게 일본이 아니라 꼭 나한테 말씀하시는 것 같았죠. ‘이분들이 돌아가시면 나도 방관자가 되겠구나, 할머니들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란 생각이 들었죠.”
그는 감독에게 영화를 만들고 싶은 이유를 알리는 전국 후원콘서트를 제안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음악인이지만, 공연은 이 영화를 위해 그가 가장 잘 도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언론이 이 영화를 주목하지 않았던 2014년 11월19일, 서울 홍대 앞 롤링홀 공연을 시작으로 강원도 원주, 충북 충주, 대전, 대구, 강원도 영월, 충북 제천 등을 도는 총 14회의 후원콘서트를 진행했다. 공연엔 그룹 레드로우, 기타리스트 김광석, 아나운서 김현경(진행)씨 등이 동행했다. 배철씨는 “먼 길을 다니며 같이 공연한 분들이 없었으면 (순회 콘서트를)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고마워했다.
해마다 겨울 ‘밴드죠 콘서트’ 수익금으로 “그해 겨울을 날 방세 정도를 마련했다”던 배철씨는 자신들의 공연을 포기하고 자비를 써가며 전국 후원콘서트를 진행했다. 콘서트는 영화 영상 소개, 음악인들의 공연으로 구성됐다.
생계보다 먼저였던배철씨는 “유명한 음악인이 아니어서 공연마다 관객 50명 정도만 와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첫 콘서트가 열린 서울부터 공연장이 찼고, 2회 원주 공연 때도 티켓 300여 장(1장당 3만원)이 팔렸다. 500여 장이 팔린 공연(대구)도 있었다. 밴드죠 김영미씨는 “티켓을 열심히 팔러 다녔는데 공연에 오지 못해도 후원하는 마음으로 티켓을 구입한 분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관객이 적은 공연도 있었다. “관객이 10명 정도였는데 그땐 출연진이 더 많았다”며 배철씨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조정래 감독과 음악인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페이스북 등에 이야기를 계속 올리고 알리는 거였어요. 장소를 바꿔 공연하게 된다면 (장소가 달라진) 포스터를 (페이스북 등에) 올려 얘기를 계속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지역 예술인들의 도움으로 장소를 구해 콘서트를 이어갔지만, 어떤 지역 관공서 쪽에선 여성회관을 빌려주기로 했다가 공연을 앞두고 대관을 취소하기도 했다. 영미씨는 “그때 포스터와 티켓까지 찍었다가 (장소가 급히 바뀌어) 변경된 부분만 수정하느라 애를 먹었다”며 웃었다. 배철씨는 공연이 열린 지역의 군수를 직접 찾아가 후원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렇게 음악인들이 콘서트를 진행하며 거둔 후원금이 약 3천만원이다.
자신들보다 을 더 앞세워 콘서트를 열었던 밴드죠는 내년이면 결성 20주년을 맞는다. 밴드죠에서 ‘죠’(Joe)는 피부색이 검은 사람을 낮춰 부를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배철씨는 “우리 음악의 출발선이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블루스 음악과 우리나라의 한(恨)이 닮았다고 생각해 이름을 ‘밴드죠’라고 지었다”고 했다.
그룹 결성 이후 80여 명의 멤버가 바뀌었고, 클래식 피아노와 실용음악을 전공한 영미씨는 2012년 여름에 합류했다. 영미씨는 합류 이전부터 “가슴을 후비는 (배철씨의) 노래와 밴드죠의 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밴드죠의 노래는 때론 나지막이 읊조리며 상대를 위로하다가도, 순간적으로 내지르는 소리로 가슴을 때리기도 한다. 한국적 음색이 묻어난다. 정규 앨범 2장, EP 앨범 1장 등을 발표했고, 등의 노래가 있다. 멤버가 지금처럼 2명으로 줄어든 것은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에 힘을 더한 영미씨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치유되는 음악을 계속 하고 싶다”고 했다. 배철씨는 “내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조정래 감독에게 고맙다”고 했다.
‘엄마도 막지 못하는 거센 바람’배철씨는 대본을 읽은 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분들에게 바치는 노래 를 만들었다. 이 노래를 녹음할 때 “너무 많이 울었다”고 한다. 후원콘서트 때 늘 부른 곡이다. 그는 일본군의 강제 동원을 ‘엄마도 막지 못하는 거센 바람’으로, 위안소로 끌려간 우리의 누이들을 ‘애처로운 아기나비’라고 표현했다. 그 가사를 옮겨본다.
아기나비는 따뜻한 봄날들판 꽃밭을 엄마만 따라다녀요
비가 와도 엄마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이 드네요
그러던 어느 날 엄마도 막지 못하는 거센 바람이 불어
바람에 휩싸여 떠돌아다니는 애처로운 아기나비
아기나비는 밤마다 꿈꾸네
엄마 품 속에 잠드는 행복한 꿈을
아기나비는 울지도 않네 지치고 지쳐서 울지도 않네
얼마나 울었을까 얼마나 찾았을까 얼마나 불렀을까
엄마 엄마 우리 엄마 엄마 엄마 우리 엄마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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