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은 출생의 비밀과 더불어 흔히 한국 드라마의 양대 ‘막장’ 소재로 불려왔다. 하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가령 김수현은 오래전부터 불륜을 여성 주체적 서사의 전위적 소재로 삼아온 대표적 작가다. 1978년 방영된 은 영화 시리즈로 대변되던 여성 수난기로서의 불륜 서사를 당시로선 파격적인 복수극으로 다시 썼고, 1988년 은 남편의 일탈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끝내 독립하는 여성을 통해 가족 이데올로기의 모래알 같은 허상을 폭로했다.
1996년 역시 불륜 드라마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음습하게만 그려지던 불륜은 트렌디 드라마의 감각적 문법 안에서 세련되게 그려졌고 ‘아름다운 불륜’이라는 모순적 유행어까지 탄생시키며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 작품 속 불륜 역시 사회적 성격을 띤다. 남편의 외도에 속 썩는 아내 이야기를 넘어 불륜의 주체 중 하나가 기혼 여성이라는 점, 주인공 운오(유동근)가 완벽한 가정 안에서도 욕망의 결핍을 느끼고 있다는 점 등의 설정은 1990년대의 변화하는 여성의식 그리고 가족제도와 자아 간의 갈등을 반영했다.
불륜 드라마가 지금처럼 이른바 ‘막장 드라마’의 대명사처럼 인식된 것은 2000년대 이후부터다. 1997년 위환위기를 기점으로 가족 해체가 가속화하면서 홈드라마 안에서도 가족 간의 갈등이 극단적으로 묘사되고 불륜은 이런 갈등을 압축하는 소재로서 점점 패륜에 가까운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막장 드라마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작품도 후안무치한 불륜 형태를 총집합한 이었고, 다음해 방영된 은 불륜에 대한 자극적 상상의 끝을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김수현 작가의 여전한 주제의식이 돋보인 나 정성주 작가의 치정극 외피를 두른 사회극 같은 문제작도 종종 등장했으나 대세는 이미 ‘막장’ 불륜 드라마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이러한 가운데, 현재 방영 중인 SBS 주말극 (사진)는 정성주의 ‘불륜 사회극’과 김순옥의 ‘막장 불륜극’을 결합한 듯한 이야기로 관심을 모은다. 남편에게 이혼당한 여자가 기억을 잃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며 그와 불륜을 저지른다는 내용만 보면, 얼굴에 점을 찍고 변신해 전남편을 유혹하는 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주인공 도해강(김현주)과 최진언(지진희)이 다시 사랑에 빠지고 기억을 복원해가는 이야기가 불륜보다 부도덕한 부패의 온상 천년제약의 원죄를 파헤치는 과정과 일치한다는 면에서는 정성주 작가의 사회극과도 유사하다.
더 나아가 가 그리는 불륜은 간통죄 폐지 이후의 고민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간통죄 위헌 판결은 불륜에 대한 형사적 처벌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근본적 윤리 문제로 재고하게 만들었다. 단순한 외도를 넘어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난 행위’라는 본래 의미가 새삼 부각된 셈이다. 는 불륜 행위보다 그로 인한 인간의 정신적 와해와 관계의 파국을 처절할 정도로 고통스럽게 묘사함으로써 그 고민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남편에게 그토록 상처받은 아내가 무의식중에 또다시 그에게 끌린다는 것과 남편이 기억을 상실한 아내에게서 과거 그녀에게 준 상처를 그대로 돌려받는다는 설정을 통해 부부 관계를 마치 윤회와도 같이 그려낸다. 영화 이 사랑의 숙명을 이야기하듯 해강과 진언의 부부애도 불가항력적 운명으로 묘사된다. 말하자면 는 기존 불륜극처럼 타인과의 일탈이 아니라 배우자와의 순수한 관계 복원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간통죄 폐지 시대에 불륜을 통해 역으로 진정한 부부와 사랑의 의미를 묻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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