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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P‘만’ 살려야 한다

<용팔이>에 나타난 계급사회의 차갑고 무서운 풍경… 부조리로 점철된 수술실 바깥은 끔찍할 정도로 현실적
등록 2015-08-25 20:47 수정 2020-05-03 04:28
SBS 제공

SBS 제공

요즘 TV에서 계급사회 한국의 풍경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르는 메디컬 드라마다. 단적인 예로, 일반 환자와 VIP 고객이 동시에 수술을 받아야 할 때 최고의 실력파 의사들이 모조리 후자의 수술방에 투입되는 장면 같은 건 이제 메디컬 드라마의 신종 클리셰가 돼버렸다. 1994년 국내 최초의 본격 메디컬 드라마 MBC 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사들의 헌신적 모습을 그렸던 시절과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메디컬 드라마 장르에 새로운 트렌드가 형성된 것은 2012년 MBC 부터다. 이 드라마는 화이트칼라 계층보다 외상으로 사망할 확률이 20배 이상 높은 노동계층이 주 대상인 중증외상센터를 소재로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으로서 국가 의료복지 시스템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그 전까지 초보 의사 성장기와 병원 내 권력 갈등 이야기가 주를 이루던 이 장르에서 강력한 사회고발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다음 해에 등장한 KBS 는 소아외과를 배경으로 저소득층 아동에 대한 의료서비스의 중요성과 영리병원 문제를 다뤘고, MBC 은 모든 생명에게 평등한 의료서비스와 능력에 따라 차별화된 의료서비스라는 상반된 가치를 주장하는 의사들의 대립에 계급 갈등을 반영했다. 올해 초 방영된 KBS 판타지 메디컬 드라마 에서도 무연고자, 독거노인, 고아 등 소외계층을 신약 개발 도구로 삼는 뱀파이어 의사의 모습을 통해 ‘이 사회 자체가 약자의 피를 빠는 거대 흡혈귀’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현재 연일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며 인기를 모으고 있는 SBS 수목극 는 이같은 메디컬 드라마 새 트렌드의 최전선에 위치한 작품이다. 작품의 중심 배경인 한신병원은 마치 영화 의 계급열차를 수직으로 세워놓은 듯한 건물로 그려진다. 병원 최상층에 위치한 12층 VIP 병동은 ‘대한민국 최상위 0.1%의 고객과 그 친구들’만을 대상으로 한 전용 의료서비스 공간이다. 그 아래층에 있는 무수한 일반 환자들은 아무리 위급한 상황에서도 VIP 고객의 호출이 있다면 가차 없이 뒤로 밀려난다. 의 주인공 김태현(주원) 역시 “보통 VIP도 아니라 초초 VVIP”의 소환으로 병원 수술 스케줄이 모조리 취소되는 바람에 수술도 못 받고 사망한 엄마에 대한 상처를 지니고 있다.

특히 4회의 병원 내 방사능 재난 사고는 그 부조리한 계급 현실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에피소드였다. 이 병원의 VIP 고객 중 하나인 한류 톱스타의 범죄 은폐를 위해 입원한 성폭력 피해자는 정신적 충격에 시달리다 방사능을 유출시켜 세상에 복수하려 한다. 이러한 시도가 알려지자 병원이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일반 환자들 모르게 VIP 고객들부터 피신시킨 것이었다. “VVIP 대피 전까지는 아무도 움직여선 안 된다”는 병원 경호 책임자의 말은 너무도 섬뜩한 기시감을 준다.

를 비롯한 최근 메디컬 드라마의 새로운 트렌드는 사실 필연적 현상일지도 모른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를 지나며 우리는 죽음에 대처하는 방식이야말로 계급 현실의 부조리를 가장 잘 보여준다는 사실을 똑똑히 목격했다. 세월호 희생자 중 기간제 교사들은 아직까지도 ‘순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나 메르스 사태 때 병원 감염 관리 체계에 비정규직원들이 포함되지 못했던 것은 단적인 사례들이다. 메르스 사태 당시 병원 의료진을 격려하던 대통령 사진 속에서 유독 강조된 “살려야 한다”는 문구는 얼마나 허망했던가. 오늘의 메디컬 드라마는 과거의 수술실 클로즈업을 벗어나 그 바깥의 병동 풀샷을 통해 ‘죽음과 재난의 계급화’를 재현하고 있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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