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어느 날 집을 떠났다. 충남 아산시의 한 시골 마을. 친구는 자전거뿐. 얼굴에는 풍자(風刺·여드름)가 송송. 소년은 바닷가 안면도에도 가고 전라도 땅도 밟았다. 자전거로 태백산맥을 넘어 경북 상주시에도 갔다. 하루 이틀씩 풍찬노숙을 하다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엉겨붙은 찰흙 같은 날,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반항심을 품고 그는 집을 나갔다.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소년은 그렇게 ‘마음의 화산’을 다스렸다. 그리고 그림.
1980년대 어느 학교에든 구타가 직업인 교사가 있었다. 교실에 들어서서 칠판을 나눠 문제를 적고는 학생들을 찍어 풀게 했다. 풀지 못하면 매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은 속이 수틀렸다. 어느 날 소년은 예의 칠판 앞으로 호출됐다. 풀라는 수학 문제는 건드리지도 않고 그 자리에 그림을 그렸다. 발정 난 개. 심지어 ‘물방울’도 몇 개 그렸다. 기가 찼는지 교사는 때리지 않고 자리로 돌려보냈다. 골방에 웅크린 소년은 큰누나가 부쳐준 의 만화를 달달 외웠고 어느 순간 필사를 하기 시작했다.
자라난 소년은 미술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었다. 강의실 의자에 앉는 날은 거의 없었다. 전공서적 따위도 사지 않았다. 시험 공부도 안 했다. 대신 공사판을 떠돌며 노동을 했다. 한 달치 땀으로 한 학기 등록금을 벌었다. 집은 정말 가난했다. “공사판에서 세상을 알게 됐어요. 정말 타락했다는 것. 타락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어요.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근데 타락의 정체가 뭘까요? 타락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니까 사람들한테 나쁜 메시지를 주는 거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사회면에 실리는 작가7월의 첫날 이하(본명 이병하·47) 작가를 만났다. 그에 관한 소식은 대부분 신문 문화면이 아닌 사회면에 실린다. 사건 기사다. 전·현직 대통령들을 풍자하는 포스터를 거리에 붙이거나 건물 옥상에서 흩뿌리는 활동을 여러 차례 해왔던 탓이다. 2011년 12월 이명박 대통령을 히틀러에 비견한 포스터 수십 장을 버스 정류장에 붙인 게 시작이었다. 2012년 5월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풍자한 작품을 서울 연희동 주택가에 붙였다. 지난해 10월에는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옥상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하는 그림 수천 장을 뿌리기도 했다. 검찰은 형법의 주거침입죄 등 무려 5가지 혐의로 이씨를 기소했다. 현재 이씨는 재판 3건에 매여 있다. ‘과격한 정치 작가’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그는 과연 그럴까.
대학에서 미술(조각)을 전공한 그는 몇몇 신문사에서 시사만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이후 애니메이션 회사도 운영하고 대학 강단에도 섰다. 그러다 2007년 영화감독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곡절 끝에 영화를 포기하고 회화로 돌아섰다. 2009년 ‘귀여운 탈레반 병사’ 그림을 시작으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2010년에는 뉴욕의 한 갤러리에서 ‘귀여운 독재자’ 연작 전시회를 열었다.
어느 날 갤러리에서 만난 루마니아 출신 여성이 그의 마음에 불도장을 찍었다. “가족들이 루마니아에서 독재자 차우셰스쿠에게 몰살되고 미국으로 망명한 여성이었어요. 울면서 저에게 차우셰스쿠를 그려달라더군요. 그때 생각했어요. 세상과 소통하면서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미술 작품이 세상과 만나야 한다고 느꼈던 거죠.” 그는 자신을 ‘액티비스트 아티스트’(행동하는 작가)로 불러달라고 했다.
진리 앞에 홀로 선 자이하씨는 컴퓨터로 작업을 한 뒤 작품을 출력해서 사용한다. 판화처럼 대량 제작이 가능하다. 그의 그림일기 연작은 작품 하나 가격이 3만원이다. ‘이발소 그림’보다 저렴하다. 부자들을 위한 미술을 하고 싶지 않다는 그의 철학 때문이다. 예술가는 철저하게 독립된 존재여야 한다는 자의식도 강하다. 그는 국내 어떤 미술단체에도 이름을 걸지 않고 있다. 진리 앞에 홀로 선 자[獨對], 예술가의 실존이다.
“‘나’의 자유를 침해하는 가장 큰 적은 마음속 의식입니다. 결코 지금 갖고 있는 의식이 정답이 아니라는 걸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권력자를 풍자하는 작업만 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어요.” 그는 거푸 담배를 피워 물었다. “통일·환경·인권·여성 등 세상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 정부의 악행이 너무 심하니까 지금으로선 이런 작품을 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독재자의 말로는 비참합니다. 결국 세상은 인간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게 돼 있어요.”
그는 웃으면 소년이 된다. 매서운 풍자인데 작품이 ‘귀여운’ 이유다. 죄악에 물들지 아니하고 순수하며 거짓이 없는 마음을 적자지심(赤子之心)이라 한다. 폭력 교사에게 복종하거나 대거리하지 않고 그림으로 저항했던 소년의 마음. 현직 여성 대통령의 머리에 해바라기를 꽂아주는 작가의 마음. 두 마음은 결국 한 물결이다. 얼굴 붉은 소년의 마음이 그의 마음이다. “정치 풍자 퍼포먼스요? 앞으로도 계속할 거예요. 죄가 아니니까요.” 부정의한 권력이 존속하는 한 그의 풍자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작가 이하의 개인전은 7월18일까지 경기도 부천시 ‘대안공간 아트포럼리’에서 열린다. 무료.부천=글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사진 김양균 객원기자 messkyk19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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