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영국 런던에서 뮤지컬 를 봤다. 극 중 빌리(제이미 벨)가 심사위원 앞에서 춤을 출 때 몸에 전기가 흐른다는 소감을 말하는 대목에서 많은 관객이 감동을 받았다. ‘그 장면이 어떻게 무대에 구현됐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고 극장에 앉았다. 막이 오른 뒤, 빌리가 등장했을 때 깜짝 놀랐다. 동양인이었다. 홍콩에서 건너온 배우였다. 빌리를 제외한 모든 배우는 백인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노란 머리카락의 백인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모습이 생경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제작사 워킹타이틀은 백인뿐 아니라 동양인, 흑인을 번갈아가며 무대에 올렸다. 빌리가 원작 영화와 달리 동양인이라고 해서 극에 몰입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는 엘턴 존이 만든 아름다운 선율에 따라 ‘Electricity’(전기, 강렬한 감정)를 빼어나게 소화했다. 동양인 빌리는 관객을 매료시켰다. 과연 다문화·다인종 사회를 지향하는 영국다웠다.
‘스파이더맨은 백인 이성애자여야 한다’는 소니와 마블의 가이드라인을 접하고 동양인 빌리가 떠올랐다. 지난 6월20일 미국 연예매체 보도에 따르면, 남자·백인·이성애자의 원칙을 ‘의무적으로’ 따라야 하는 내용이 담긴 양사의 법적 라이선스 계약이 2011년 9월부터 효력을 발휘했다. 한 매체는 계약 시점이 의문스럽다고 했다. 계약 한 달 전인 8월에 흑인-라티노 스파이더맨 마일스 모랄레스가 코믹북에 처음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계약은 유색인종 스파이더맨을 차단하려는 속셈이 아닌가. 양사는 이에 대해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2010년 흑인 배우 도널드 글로버는 새로 시작하는 의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캠페인을 벌였다. 마블 쪽은 “피터 파커가 흑인이 된다면 기존 관객들의 혼란을 야기할 것 같다”고 답했다. 가이드라인에 따라 지난 6월24일 소니와 마블은 토비 맥과이어, 앤드루 가필드에 이은 3대 스파이더맨으로 영국 백인 배우 톰 홀랜드를 발탁했다.
유출된 가이드라인은 통상적인 것을 확인한 차원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원작 만화에 피터 파커는 남자, 백인, 이성애자였으니까. 그러나 스파이더맨은 픽션이다. 가공의 이야기다. 실존 인물이 아니고, 현실에 존재하는 초능력자가 아니다. 사회 변화에 따라, 대중의 인식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재해석이 가능하다. 워킹타이틀이 동양인과 흑인 빌리를 무대에 올렸듯이, 할리우드도 동양인과 흑인 스파이더맨을 캐스팅할 수 있다. 영화의 완성도가 높다면 ‘관객의 혼란’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고, 골수팬들의 저항도 사그라지게 할 수 있다.
마블은 코믹북에서 다양성을 추구한다. 지난 6월23일엔 마일스 모랄레스가 코믹북에 정식 입성했다고 밝혔다. 그전엔 흑인 캡틴아메리카도 등장했다. 여자 토르도 나왔다. ‘영 어벤저스’라는 팀에는 소년·소녀 히어로들은 물론 동성애 사이인 히어로들도 있다.
코믹북은 다양해지고 있는데, 스크린은 여전히 보수적이다. 할리우드는 인종주의의 벽에 갇혀 있다. 지난해 영국 의 보도에 따르면, 2007~2013년 개봉된 주요 작품에 등장하는 배역 중 백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75%에 달한다. 지난 3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흑인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서 킹 박사의 전기 영화 가 감독상과 연기 부문상 노미네이트에서 제외됐다. 흑인 차별이 아니냐는 논란이 불거졌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최근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여전히 인종차별은 미국인의 DNA에 이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피부색에 대한 편견은 종종 여성, 동성애자,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소니와 마블의 계약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지만, 영화에서 다양한 인종과 성별의 스파이더맨의 탄생 가능성을 열어뒀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들도 빌리처럼, ‘Electricity’를 느낄 수 있도록.
곽명동 객원기자· 기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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