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하는 남자들이 대세다. 적어도 텔레비전 예능에서만큼은 앞치마를 두른 여자보다 남자를 더 많이 만날 수 있다. 오죽하면 ‘요리 솜씨로 여성을 매혹하는 남자’를 뜻하는 신조어도 생겼다. 미식가라는 뜻의 ‘게스트로놈’(gastronome)과 성적 매력을 뜻하는 ‘섹슈얼’(sexual)을 합친 ‘게스트로섹슈얼’이라는 단어다. 영국 공영방송 <bbc>의 요리쇼 의 명랑 청년 제이미 올리버, 미국 방송 의 요리 서바이벌 의 독설가 고든 램지 등 매력적인 남성 셰프들이 세계적 인기를 끌면서 유행하게 된 이 말은, 국내에서도 남성들이 진행하는 요리 프로그램이 부쩍 늘어나는 데 일조했다.
‘요리하는 남자’ 판타지 뒤엎기
현재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는 (tvN) 역시 남자들의 요리 예능을 표방한다. 나영석 PD와 이서진의 재회만으로도 화제를 모았던 이 프로그램은 화학조미료 예찬자 이서진이 순도 100% 유기농 먹거리로 ‘집밥’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여기에 아이돌 그룹 2PM의 멤버이자 배우인 옥택연이 가세했다. 지난 8월 종영된 KBS 주말드라마 에서 이서진과 함께 형제지간을 연기한 인연이다. 만사를 귀찮아하지만 은근히 완벽주의인 이서진과 매사에 열심이나 허당 기질이 다분한 옥택연, 두 남자의 좌충우돌 밥짓기가 의 주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 제목처럼 마냥 소박한 밥상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의 진미는 오히려 그 한없이 덤덤해 보이는 제목 안에 숨어 있다. 모든 요리 프로그램이 결국 한상 차림의 특별단막극을 그려낸다면, 는 끝없이 반복되는 밥상의 일일극을 보여준다. 아침밥을 지어 먹고 뒷정리까지 마치고 나면 곧 점심 식사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고, 그 밥상을 물리고 나면 어느새 또 저녁 준비 시간이 다가오는 여성들의 일상적 가사노동 현장이 그 안에 있다.
급기야 “우린 뭐 하루 일과라는 게 없어? 끝이 없는 거야?”라며 부엌일에 지친 이서진이 울화통을 터트릴 때는 기존 남자 요리 예능 속 ‘게스트로섹슈얼’의 판타지가 시원하게 부서진다. 는 말하자면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프로그램이라기보다 실은 그것이 감추고 있던 여성들의 진짜 부엌 노동을 가시화하는 프로그램으로 다가온다. 남성들의 진출과 더불어 어느덧 화려한 전문직의 공간으로 격상한 ‘키친’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아궁이의 풍경이랄까.
실제로 이 프로그램은 식구들을 위해 매일같이 ‘삼시세끼’를 준비하는 여성들의 반복적 가사노동, 특히 그 고단함이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시집살이 체험극을 보듯 시청할 때 더 재밌다. 조선시대 소박의 조건이던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며느리같이 아궁이 곁을 떠나지 못하고,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노동”에서 벗어나 읍내로 마실 나갈 기회만 꿈꾸는 이서진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신구와 백일섭이 손님으로 등장한 2회는 더 노골적인 역할극이다. 이서진과 옥택연은 급작스럽게 방문한 시어머니를 맞은 며느리인 양 대접하느라 부산하고, 그들이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일일이 지적하는 신구와 백일섭은 영락없이 잔소리하는 시어머니를 닮았다. 세 번째 손님 김광규가 출연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노동의 수고를 덜어줄 일꾼을 학수고대하던 이서진은 마치 막내동서 부리듯 그를 다룬다. 첫 번째 손님 윤여정과 최화정이 에서 이서진과 옥택연의 헌신적인 어머니였다는 사실까지 떠올려보면 가 집밥을 소재로 펼쳐 보이는 성역할 역전극은 꽤나 흥미롭다.
꽤나 흥미로운 성역할 역전극
서구에서 ‘게스트로섹슈얼’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배경에는 여성의 사회활동이 늘어나면서 남성들의 주방 일이 자연스러운 모습이 된 시대적 변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남녀의 공평한 가사분담이란 아직도 요원하다. 지난해 통계청이 발표한 가사분담 조사에 따르면 ‘여성과 남성이 공평하게 가사를 분담해야 한다’는 기대와 실생활에서의 분담 실태는 큰 차이를 보였다. 절반 이상의 여성들이 공평하게 분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실생활에서 분담하는 비율은 15%에 머물렀다. 맞벌이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2년에 실시한 ‘맞벌이 부부 가사노동 시간’ 조사는 맞벌이 여성이 3.3시간 가사노동을 할 때 남성은 41분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남자 요리 예능 프로그램의 증가와 인기는 이런 현실 속에서 실현되지 못하는 여성들의 욕망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요리는 여성들의 비가시적인 노동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을 전시하는 판타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적어도 부엌 노동만큼은 그 전 과정을 편집 없이 드러낸다는 것만으로도 의 존재는 꽤나 소중하다.
김선영 TV평론가</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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