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를 흥행시킨 김영탁 감독과 차태현이 다시 만난 후속작이다. 영화는 여장부(차태현)가 자신의 ‘동체시력’에 대해 설명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동체시력은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가 마치 ‘슬로우 비디오’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남들이 못 보는 걸 볼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지만 뛰면 어지러워서 넘어진다. 그는 첫 장면부터 자신의 동체시력을 “(초)능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병”이라 설명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체시력을 초능력이 아닌 병이나 장애로 취급한다. 그는 동체시력으로 인해 초등학교 때부터 왕따를 당하고, 유일하게 친했던 수미와도 헤어진다. 이후 방에 틀어박혀 20년간 TV 드라마만 보다가, 세상으로 나와야겠다고 결심한 뒤 폐회로텔레비전(CCTV) 관제센터에서 일한다. 관제센터에서 CCTV 화면을 보던 그는 수미와 꼭 닮은 여자(남상미)를 발견하고 접근한다.
저성장의 기류가 이제 한국에도
영화는 별다른 사건 없이 느리게 전개되며, 현실적인 질감이나 중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가 갑자기 관제센터에 어떻게 취직하게 되었는지, 근무조건은 무엇이었는지 등은 설명되지 않는다. 관제센터에서 일하며 그가 동체시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주로 외로워 보이는 동네 사람들을 관찰하고, 수미의 동선을 추적하며, 자기 손으로 더듬고 발걸음을 세어가며 만든 골목지도를 완성하는 데 열중한다. 뮤지컬배우 지망생이자 빚더미 알바생인 수미는 물론이고, 관제센터의 동료들이나 동네 사람들은 모두 몇몇 일본 영화 속에서 보았던 분위기를 자아낸다. 공손하고 할 일 없으며 적당히 단절돼 있는 그들은 등 나른하고 심드렁한 느낌의 일본 영화들을 연상시킨다. 다른 것이 있다면 영화가 낯익은 서울 종로구 일대를 정겹게 비춘다는 것 정도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일본 분위기를 무리하게 흉내낸 영화인가? 그렇지 않다. 는 앞의 일본 영화들이 만들어진 사회적 배경이 되었던 1990년대 거품 경제 붕괴 뒤의 ‘로스트제너레이션’의 출현과 저성장의 기류가 이제 한국에도 도착했음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취업 과정이 왜 생략됐는지, 동체시력은 왜 끝까지 능력으로 발휘되지 않는지는 영화의 결말을 보면 납득된다. 동체시력은 일종의 상징이다. 그는 빠르게 움직이는 현실세계에서 자신만이 느리게 움직이는 세계를 지각한다. 이는 굉장한 능력일 수도 있지만, 현실세계의 속도에 맞춰 빠르게 달리지 못하는 탓에 장애로 취급된다. 즉, 빠르게 돌아가는 사회에서 느리게 느끼며 움직이는 사람은 현실부적응자가 된다. 동체시력을 지닌 그는 왕따를 당해 방에서 TV만 보고 살다가 기껏 사회에 나와서도 CCTV로 다른 사람들을 관찰한다. ‘구경만 하고 있는 아이가 있고, 세상을 살아가는 어른도 있고’란 노랫말처럼 세상을 구경만 하는 이는 본질적인 의미에서 아이다. 그는 ‘이지메’와 ‘히키코모리’를 거쳐 여전히 ‘미생’(아직 살아 있지 못한 상태)의 존재다.
그는 지금 한국 사회의 젊은 세대가 처한 상태를 징후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빠르게 돌아가는 경쟁사회에서 패퇴했거나 합류하지 못한 채 느리게 개인적 삶을 향유하고픈 주체다. 그에게 일은 임시적이며, 개발이 비껴간 동네에서 토박이로 살며 어린 시절 좋아했던 친구와 은행잎이 반짝이는 거리를 산책하거나, 동네 사람들과 마을버스를 타고 바다에 가고픈 동화적 상상으로 가득하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에겐 엄마의 품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저성장 시대에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채, 성공 등 사회적 욕망을 폐기하고 개인적 삶을 꿈꾸는 새로운 주체(잉여)의 모습이다. 그의 이름이 여장부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여성화된 남성, 즉 사회적 욕망을 거세한 남성을 뜻한다. 만약 영화가 그에게 사회적 욕망을 부여했다면, 그는 동체시력을 이용해 타짜가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가끔은 느리게 흐르면 좋을 텐데”이러한 문제의식을 감독과 차태현의 전작 와 비교해보면 더욱 흥미 있다. 일생 외롭게 살다가 실직 뒤 자살을 시도하던 청년이 여관비 2만원 때문에 살아난다. 번번이 자살에 실패하고 깨어난 그에게 남녀노소 귀신들이 들러붙는다. 귀신들 때문에 죽지도 못하게 된 그는 귀신들의 소원을 들어주다가 그들이 자신의 가족임을 깨닫는다. 영화는 차태현의 등에 일가족이 업혀 있는 이미지로 요약된다. 이는 고아 의식을 지닌 채 살아가던 젊은이가 경쟁에서 패퇴한 뒤, 가족의 존재와 기대를 깨닫고 어떻게든 생의 의지를 다독여가는 심리적 상태를 재현한 것이다. 에서 가족들의 기대를 지렛대 삼아 어떻게든 살아가려던 젊은이는 이제 에서 사회적 속도에 부적응을 느끼다가, 아예 장애의 방식으로 함몰해 자신만의 속도와 세계를 마련코자 한다. 그는 “다들 너무 빠르고 바쁘게 산다. 내가 보듯이 가끔은 느리게 흐르면 좋을 텐데”라고 말한다. 저성장의 시대, 속도에 치인 젊은이들의 낮은 읊조림이다.
황진미 영화평론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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