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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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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는 끝났다

꿈같은 김연아의 마지막 연기는 안타까운 이별 위한 완벽한 결말
언젠가 그날의 진실에 대해 누군가 말문을 열 것
등록 2014-03-05 18:15 수정 2020-05-03 04:27
인터넷에서 영호남 지역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포털의 뉴스 댓글 게시판에서 혐오의 언어들이 특정 지역을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한겨레 박종식

인터넷에서 영호남 지역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포털의 뉴스 댓글 게시판에서 혐오의 언어들이 특정 지역을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한겨레 박종식

그녀와의 ‘화양연화’는 끝났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그것은 ‘쿨러닝’ 같은 꿈이었다. 피겨는 은밀한 쾌락이었다. 주변에 피겨팬은 없었다. 그 아름다운 점프와 그 우아한 스케이팅과 그 환상적인 스핀을 보는 즐거움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렇게 20여 년이 흘렀다. 꿈꾸지도 않았던 무대에 김연아 선수가 나타났을 때, 피겨를 조금은 보아온 이에게 그것은 자메이카 봅슬레이 선수들이 올림픽에 참가하는 일과 같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피날레. 에 맞춰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마지막 연기를 하는 순간, 의 장만위(장만옥)가 겹쳐졌다. 우아하고 도도하고 정확했다. “김연아는 탱고와 어울린다. 김연아는 알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있는 것 같다.” 김연아의 마지막 연기를 보고 스위스 해설자가 했다는 말처럼, 탱고는 안타까운 이별을 위한 완벽한 결말이었다.

기술점수로 장난칠 줄은 몰라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에 ‘설마’ 했던 반전이 있었다. 점수가 나오던 순간에, 나도 모르게 앞에 있던 책상을 내리쳤다. 원래, 피겨가 그렇지, 체념이 되지를 않았다. 홈어드밴티지는 인류 보편의 법칙이야, 알지만 수긍되지 않았다. 마치 사법 피해를 당한 사람처럼, 부당함의 증거들을 찾기 시작했다. 꼼꼼히 볼수록 말문이 막혔다. 러시아 선수들은 그렇다고 치자. 프리스케이팅 점프에서 한 번 넘어진 미국의 그레이시 골드 선수의 프리스케이팅 기술점수가 클린 연기를 한 김연아 선수와 소수점 아래만 다르고 같았다(넘어져서 받은 -1점을 빼면 그렇다). 미국 언론매체 (Wire)의 기사가 동영상과 함께 지적한 것처럼,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의 러츠 점프는 ‘플러츠’(Flutz)였다. 스케이트의 바깥 날로 뛰어야 하는 러츠 점프를 플립 점프처럼 양쪽(혹은 안쪽) 날로 뛰는 것을 일명 ‘플러츠’라고 한다. 롱 에지 판정을 받아 점수가 깎여야 하지만, 심판은 그러질 않았다. 익명의 채점표도 의혹투성이다. 소치 올림픽 직전에 피겨를 좋아하는 지인에게 “심판들이 스텝과 구성점수를 낮게 줄 것 같은데”라고 걱정한 적이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역사에 없었던 교과서 점프를 뛴다는 선수에게 기술점수로 장난칠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행복한 마음으로

본인은 괜찮다고 하는데,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는 감정은 뭐냐고 자문했다. 지금껏 쇼트트랙이 결함 있는 스포츠라 생각했다. 너무 많은 변수와 너무 강한 심판의 개입, 옳지 않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번 올림픽, 생각이 변했다. 쇼트트랙이 인생을 담은 경기로 보였다. 자기 혼자만 잘한다고 성취가, 결과가 꼭 좋으란 보장이 없는 지금 여기의 인생 말이다. 어쨌거나 부딪히면, 파울을 줄 수도 안 줄 수도 있는 것이 이 게임의 룰이다. 중국 선수와 스케이트 날만 슬쩍 부딪혔을 뿐인데 밴쿠버 올림픽의 금메달을 잃은 한국 여자계주팀의 불운도 ‘그럴 수 없지만, 그렇다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게임의 룰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심도 경기의 일부다. 김연아 선수의 말대로 채점은 “심판이 하는 것”이지만, 홈어드밴티지를 넘어선 편파 판정은 재고돼야 한다. 이건 게임의 룰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팬들의 분노야말로 스포츠의 오래된 일부다. 의도된 오심은 경기의 일부가 아니다. 비유컨대 이건 여자 500m 스피드스케이팅에서 2위로 들어온 러시아 선수에게 금메달을 준 것과 다르지 않다.

“소치로 가는 결심을 하기가 가장 어려웠다.” 2011년 세계선수권대회 영상을 다시 보면서 이 말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바위같이 단단하다’고 하는 3회전 연속 점프에서 실수하는 연아를 보았다. 프리스케이팅을 끝내고 굳은 얼굴을 보았다. 스무 살에 올림픽 챔피언이 돼서 모든 것을 이룬 스물한 살의 그녀는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좀처럼 하지 않는 실수를 하면서 말이다. 나라도 하기 싫었을 것이다. 목표의식을 잃은 사람이 지친 몸을 이끌고 오직 자신이 받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거기까지 왔다. 마지막 올림픽은 팬들을 위한 ‘순수예술’이었던 셈이다. 클래스가 다른 그녀의 팬들은 썼다. “다른 선수는 경기를 했지만, 김연아 선수는 연기를 했다.”

의 량차오웨이(양조위)가 장만위와의 추억을 오직 앙코르와트 돌 틈에 대고 속삭였듯, 승냥이들의 분노는 반향 없는 목소리가 되고 있다. 그래서 어떤 팬은 자신들만의 공간(디시 연아갤)에 그녀와의 추억을 이렇게 돌이켰다. “연아의 컴피(경쟁대회) 커리어는 끝을 맺었다. 그 마지막에 대해서 분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시원하거나 섭섭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행복한 마음이 크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긴 시간에 걸쳐 한 소녀가 전설적인 스케이터로서 그리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인격체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으니까. 정말 좋은 꿈을 꾸었다….” 아디오스, 김연아.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는 그날의 진실에 대해 말문을 연다는 것에 내기를 걸겠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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