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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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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멋있는 민중미술!

투쟁 현장에서 쉼터가 되고 수호자가 되고 생활도구가 된 강철무쇠,
세상 떠난 지 10년 여전히 노동현장을 위무하는 고 구본주 회고전
등록 2013-09-18 16:10 수정 2020-05-03 04:27
성곡미술관에서 구본주의 작품을 설치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들. 동료 작가와 농성 노동자가 힘을 합쳐 그의 전시장을 완성했다. 신유아 제공

성곡미술관에서 구본주의 작품을 설치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들. 동료 작가와 농성 노동자가 힘을 합쳐 그의 전시장을 완성했다. 신유아 제공

8월 중순 태양이 작열하던 어느 날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한 성곡미술관 앞마당이 시끄럽다. 거대한 신발이 크레인 위에 둥둥 떠 있고 대형 트럭이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다. 2003년 세상을 떠난 고 구본주의 10주기 전시 준비 중이다.

나르고 청소해주러 달려온 해고노동자들

구본주의 부인 전미영은 나와 인연이 있다. 서울 용산 참사 현장에서 전시 기획 및 현장 미술작업을 함께 했고 이때 모인 몇몇 작가와 파견미술팀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함께했다. 노동의 현장, 소외된 현장에서 미술작업과 설치작업을 함께하기도 하고, 파견미술팀에 속한 작가들의 개별 전시나 현장 설치작업이 있을 때면 누구랄 것도 없이 모여 작업을 함께해왔다.

의리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찾아간 성곡미술관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구본주의 작품은 그 규모나 양이 엄청났다. 지난 9년간의 전시와는 다르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유작들이 한 공간에 모이면서 전시 준비 기간과 설치해야 할 작품의 양은 그동안 전시 준비를 함께 해왔던 몇몇 작가가 진행하기엔 터무니없이 많아 보였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구본주의 전시를 알리고 함께해달라고 요청했다. 다음날 그리고 또 그 다음날 함께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간다. 하루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가, 다음날은 콜트·콜텍 해고노동자가, 또 다음날은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한걸음에 달려와 작품을 나르고 전시장을 청소한다.

짧은 삶을 살다 간 구본주의 작업은 그 양이나 질 면에서 놀랍다. 그만큼 그의 작업에 대한 열정을 가늠할 수 있다. 혼자 한 작업이라고 생각하기엔 그 규모가 엄청나다. 성곡미술관 앞마당에 한가득 서 있는 그의 신발은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진가, 판화가, 시인, 미술가, 그리고 투쟁 현장의 많은 해고노동자들이 구본주의 작품을 나르고 닦는다. 여름 뙤약볕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성스레 닦고 있는 한 사진가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작업이 길어질수록 수다는 늘었고 사람들이 기억하는 구본주가 스멀스멀 성곡미술관으로 걸어온다.

기륭전자 해고노동자 투쟁 당시 구본주의 작품은 농성 현장과 함께 있었다. 농성장 바로 앞에 서 있던 는 노동자들의 쉼터이자 생활의 도구가 되었다. 그의 작품 위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기도 하고, 식사 때가 되면 음식을 만드는 테이블로 쓰기도 했다. 경기도 평택 대추리 마을 분교에 있던 은 마을 주민들을 위로하고 마을을 지키는 수호자였으며,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분향소가 설치됐던 대한문에 있던 은 삶의 고단함을 함께하는 동지였다. 노동자들은 구본주를 몰랐지만 그의 작품과 함께 그를 만났다.

구본주 전시회 포스터. 아래는 그의 작품. 성곡미술관 제공

구본주 전시회 포스터. 아래는 그의 작품. 성곡미술관 제공

전시 준비 첫날 대형 크레인에 몸을 맡긴 채 허공에 떠 있는 작품들이 아슬아슬하다. 미술관 여기저기에 내려진 작품들을 사람들이 전시장 안으로 옮긴다. 강철무쇠. 구본주의 작품 대부분이 철과 동으로 이루어졌음을 감안하면 그 무게는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육중한 남성 대여섯이 옮기기에도 버거운 작품을 들었다 놨다 반복하기를 수십 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즈음 시원한 바람이 분다. 잠깐 쉬는 시간을 틈타 담배를 입에 물고 후 내뱉는 연기 속에 구본주를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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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주와 대학 시절을 함께 보낸 연영석은 지금 민중의 삶을 노래하는 가수다. 그는 대학 시절 미술학도였다. 그의 삶에 민중을 끌어 들인 게 구본주였다. 연영석이 구본주의 작업실을 자주 드나들었고 가끔 귀가 시간이 지나면 작업실을 숙소로 사용했다. 어느 날 새벽 작업실에서 자던 연영석을 깨우며 구본주는 뜬금없이 “내일 서울대 가자!”고 했다. 아마도 당시 서울대에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출범식 같은 집회가 있었던 모양이다. 연영석은 “거길 뭐하러 가냐”며 도리질을 쳤고 구본주는 “너 집에 가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연영석이 대학 1학년 때의 이야기다.

‘조각가 구본주’가 ‘무직의 자살자’로

전시 준비 둘쨋날, 셋쨋날, 넷쨋날…. 다시 작품을 닦고, 나사를 박고, 부서진 부위를 수리하면서 설치 공간을 만들어간다. 몇몇 작가는 아예 집에서 짐을 싸들고 나와 미술관 앞 어딘가에 숙소를 잡고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중 한 사람이 판화가 이윤엽이다. 1996년 수배자로 도망 다닐 당시 경기도 수원으로 피신해 있던 구본주는 노동미술연구소라는 공간에서 생활을 했고 수원에 살던 판화가 이윤엽은 노동미술연구소를 들락거리며 민중미술을 접하던 시기에 그를 처음 만났다. 구본주의 작업은 민중미술에 염증을 느낀 이윤엽의 작품세계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구본주의 초기 작업은 구상 작업에 충실했으며 인체에 대한 해박한 이해는 그의 이후 작품세계에 큰 에너지가 되었다. 구상에 충실했던 작업이 점차적으로 신체의 변형과 과장을 만들어냈고 그의 과장과 변형은 불편함보다는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이윤엽은 “민중미술이 저렇게 멋있을 수도 있구나”를 연발하며 자신의 작업 안에 구본주를 불러들였다.

전시 준비가 거의 마무리될 즈음, 성곡미술관에 위치한 카페에 앉아 전시 과정에서 힘들었던 이야기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그러던 중 구본주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구본주는 2003년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 인연이 된 사진가 노순택은 그를 처음 알게 된 사연을 이야기한다. “그의 죽음은 뉴스로 흘러나왔다. 죽었다는 뉴스가 아니라, 그 죽음에 대한 보험금 산정을 두고 벌어진 해프닝이 뉴스였다. 보험회사는 황망한 그의 죽음을 ‘자살과 다를 바 없는 교통사고’라 불렀다. 인정할 수 있는 ‘예술가 경력’은 길어야 3년, 사실상 육체노동이므로 ‘가동연한’은 60살까지라 했다. 수입을 증빙할 서류도 없으므로, 계산되어야 할 나머지 삶에 대한 보험금은 ‘일용직 노동자’에 준해야 마땅하다는 거였다. ‘조각가 구본주’가 ‘무직의 자살자’로 처리되는 데 걸린 시간은 짧았다. 삼성화재 앞마당에서 ‘무직자들’의 망측한 1인시위 릴레이가 이어지던 어느 날, 나도 불려나감으로써 고인과 연을 맺었다.”

‘노동’을 철거해 소각했다는 중구청

끝없이 회자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구본주는 기억 밖으로 나왔다. 지난 6월 대한문 쌍용차 해고노동자 분향소가 있던 자리에 함께했던 구본주의 작품 은 경찰과 서울 중구청 직원들에 의해 철거됐는데 구청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경찰의 말에 중구청에 확인한 결과 철거 물품 보관 이후 전부 소각했다고 한다. 강철무쇠로 만든 을 소각한 중구청은 작품 탈취 및 훼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신유아가, 연영석이, 이윤엽이, 노순택이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가 구본주를 만난 것처럼 사람들은 구본주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구본주 10주기 전시 중인 성곡미술관 1층 전시실에 가면 우르르 쏟아져 내려오는 샐러리맨들이 있다. 밤이면 더욱 반짝거리는 무수한 사람들, 그 속에 내가 있고 우리가 있다. 샐러리맨 한명 한명을 천장에 매달며 뻐근해진 목덜미를 움켜쥔다.

조각가 구본주는 지금도 뻐근해진 목덜미만큼 고단한 작업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해본다. 성곡미술관에서 구본주의 전시는 10월까지 진행된다. 그의 작품과 함께 삶의 고된 땀을 흘려보면 좋겠다.

신유아 문화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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