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균
만화가 윤태호가 그리는 의 주인공 장그래가 다니던 회사에 서 결국 해고됐다. 인턴사원이기 때문이다. 계약을 했고, 그 기간이 끝났고, 그리고 잘린다. ‘미생’은 ‘완전히 살아 있지 않은 상태’를 뜻 하는 바둑 용어다. 살아 있는 것도, 살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모든 청춘에게 연대를!
이번주에는 아내가 아닌 편집장에게 옆구리를 찔렸다. 사연은 이렇 다. 감자와 토마토로 만든 크로켓(967호 ‘경양식은 죄다 일본식이었 구나’) 편에서 멜론으로 만들 수 있는 레시피를 제보해달라고 요청 했다. 배기욱 독자님의 전자우편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멜론에 이 탈리아식 생햄인 프로슈토를 얹어먹는 전채요리다. 아, 이게 있었지. 멋진 마리아주다. 감사의 말씀 전한다. 하지만 실제로 만들진 못했 다. 소문난 메로×광인 최우성 편집장이 직접 ‘오더’를 내 린 건 아니었다. “멜론맛 아이스크림을 만들면 될 텐데….” 다른 기자 를 통해, 간접적으로 옆구리를 쿡 찔렸다. 마침 인사평가 시즌이었 다. 이 무슨 천재적인 노무관리란 말인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동 네 마트에서 잘 익은 멜론 두 통과 생크림, 연유를 샀다.
늦은 밤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홀린 듯이 500cc가량의 생크림을 쳤다. 크림을 너무 많이 올리면 푸석푸석하게 얼어버릴 것 같았다. 적당히 쳤다. 멜론 한 통의 씨를 빼고, 과육을 갈면서 반컵 분량의 연유를 함께 넣어줬다. 멜론과 연유가 충분히 달기 때문에 따로 설 탕은 넣지 않았다. 생크림과 멜론 과즙 을 잘 섞었다. 그리고 냉동실에 넣었다. 15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이미 자정 이 지나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뒤 늦게 깨달았다.
특별한 장비 없이 집에서 아이스크림을 만들 때는 1~2시간마다 냉동실에서 꺼 내 잘 섞어줘야 한다. 아뿔싸. 어쩔 수 없었다. 커피를 한 잔 내려 마 셨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부엌을 들락거렸 다. 먼동이 터올랐다. 편집장의 간식을 위해 밤을 새우고 있다니. 취 재를 이렇게 해야 할 텐데. 졸음과 설움이 북받쳤다. 잠깐 눈을 붙인 다는 게 그대로 잠들었던 것 같다. 한두 번 정도만 더 하면 될 것 같 았는데. 눈을 뜨자마자 냉동실 문을 열었다. 아이스크림이 되었어야 할 멜론즙과 과육이 가득한 크림 덩어리는 아이스크림도 아닌, 그렇 다고 셔벗도 아닌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미생이랄까.
얼음보숭이 같은 식감만 빼면 다행히 맛은 괜찮았다. 수상한 재료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시원한 멜론의 맛이 정직하게 났다. 곁들일 멜론을 썰고, 아이스박스에 내용물을 챙겨 출근했다. 무더운 여름날 오후 출몰하곤 하는 아이스크림 셔틀에 메로×가 빠져 있으면 노골 적으로 서운해하던 편집장도, “어디 실패작만 갖고 오려느냐”던 팀 장도, “네가 요리를 해봤자 얼마나 하겠느냐”던 동료들도 맛있게 먹 어줬다. 부족한 디저트지만 장그래씨에게도 한 그릇 대접하고 싶어 졌다. 그가, 잘됐으면 좋겠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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