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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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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미약했고 끝은 저열했다

자전거 전국일주와 크라운맥주
등록 2013-07-18 17:43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자료

한겨레 자료

그해 여름은 무지 더웠고 일도 많았다. 월드컵과 기말고사가 겹쳤다. 둘 다 망했다. 종강을 하고 농활이냐, 전지협 투쟁이냐, 이런 걸로 지 지고 볶다가 그냥 농활을 갔다. 그렇게 간 농활도 참 그랬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영어나 형광색이 들어간 옷은 입으면 안 된다고 했다. 단체로 맞춘 농활 티셔츠를 달랑 한 장 주면서. 여학생 들은 짧은 반바지도 못 입게 했다. 아쉬웠다. 농민들이 먹을 거 준다 고 막 먹지 말라고 했다. 우리 집보다 잘사는 것 같은데.

어쨌든 민폐는 제대로 끼쳤다. 기계화 영농을 시도하겠다며 경운기 를 몰고 나간 선배는 도랑에 경운기를 처박았다가 소가 끌고 나왔다. 나는 효성스즈끼인지 대림혼다인지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마실을 나갔다가 나자빠졌다. 오른쪽 이마, 팔, 다리를 시멘트 바닥에 갈아버 렸다. 오토바이는? 오토바이 주인이 그날 몸져누웠다.

농활에서 돌아왔더니 백골단이 학교 도서관까지 밀고 들어왔다. 얼 굴만으로도 엑소시즘이 가능할 박홍 신부가 주사파를 떠들기 시작 한 것도 그때였다. 뭐 하나 제대로 한 것은 없지만 어쨌든 여행이 가 고 싶었다. 그것도 자전거 전국일주를.

열흘 정도 일정으로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려고 했다. 남자는 직진이 니까. 보험사에서 나눠주는 여름휴가맞이 전국도로지도를 챙겼다. 그건 자전거 따위가 아닌 자동차를 위한 것인데, 그걸 몰랐다. 배낭 은 온갖 불필요한 짐들로 채워졌다. 심지어 자명종까지 넣었다.

집을 나선 것은 아침 7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아무 생각 없이 산업도 로를 따라 달렸다. 화물차 때문에 죽을 뻔했다. 1시간 정도 달리니 배 낭에 귀신이 들어 있는 게 분명했다. 장난 아니게 무거웠다. 어깨는 벌써 까졌다. 낮 12시. 경기도 수원에 도착했다. 죽을 것 같았다. 장하 다. 오늘은 여기까지. 바로 묵을 곳을 찾았다. 도심에서 떨어진 국민 학교가 개축 공사 중이었다. 일하는 아저씨들이 공사용 널판으로 지 은 숙소에 하루 재워준다고 했다. 학생이 혼자 자전거여행이라니 대 단하다고 했다. 오늘이 첫날이라고 차마 말 못했다.

숙소가 정해지자 만사가 귀찮아졌다. 학교 앞에 문방구를 겸한 구멍 가게가 있었다. 그늘 시원한 느티나무에 평상도 있었다. 가게에서 병 맥주를 샀다. 지금은 사라진 크라운맥주였다. 오비만 마셨는데, 촌스 런 왕관이 이렇게 시원하고 맛있었다니. 그렇게 평상에 앉아 혼자서 7병을 내리 마셔댔다. 술김에 수첩을 뒤져 예쁜 애들에게 공중전화 로 삐삐도 쳤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밤이 되자 아저씨들 사이에 누웠다. TV에서 나오는 드라마 을 보다가 잤다.

시작은 미약했고 끝은 더욱 저열했다. 다음날 아침 수원역으로 자전 거를 몰았다. 타고 간 자전거는 미련 없이 기차화물로 서울역으로 부 쳤다. 나는 수원역에서 전철을 탔다. 잘 다녀오라던 아버지의 얼굴이 밟혀 집으로 가지 못했다. 학교 근처 친구 하숙집에 짐을 풀었다. 거 기서 일주일 정도 놀았다. 2학기가 개강하고 두 달이 넘어서야 연체 료를 물고 서울역에서 자전거를 찾아왔다. 자전거는 얼마 뒤 학교에 서 도둑맞았다. 크라운맥주가 마시고 싶다.

김남일 기자 한겨레 정치부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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