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면 출세하라.” 이 말 한마디면 ‘갑질’ 해대는 이에게 치를 떨던 ‘을’들의 입도 쑥 들어가게 마련이다. 수천m 상공의 비행기 비즈니스석에서 라면 갖고 승무원을 닦달하다 폭행한 대기업 임원, 아버지뻘인 대리점주에게 욕설을 내뱉는 본사 영업사원의 정신세계는 모두 ‘갑’이 되고자 달리고 ‘을’의 수치를 당연시하는 ‘갑을관계가 지배하는 대한민국’ 고유의 것이다.
‘갑을’ 출발점은 ‘관존민비’지은이 강준만 교수(전북대 신문방송학)는 한국인이 갑을관계에 중독된 원인을 찾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출발점은 ‘관존민비’다. 조선 말기를 떼어놓고 보면 ‘매관매직’ 한마디로 설명이 끝난다. 태어날 때부터 ‘슈퍼 을’로 주홍글씨가 새겨져 온갖 설움을 받아온 일반 백성들은 죽을힘을 다해 양반, ‘갑’이 되고자 했다. 대구 지역에선 1690년 9.2%에 불과하던 양반 비율이 1783년에는 37.5%, 1858년에는 70.3%, 조선 말기에는 90%에 육박할 지경이 된다. 본전 생각에 착취를 일삼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일제강점기로 가면 더 심해진다. 지은이는 ‘출세’라는 말이 세속적 성공을 뜻하는 말로 변질돼 퍼진 것도 일제가 친일 지식인을 적극 육성한 1920년대 중반부터임을 지적한다. 조선시대에 추구된 ‘입신양명’은 국가라는 무대가 전제돼야 하기 때문에 국가를 잃은 식민지에서는 불가능했다. 타협적 신문화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지식인들에게는 양명이 아닌 출세가 필요했다.
‘뜯어먹기 경연대회’라고 해도 좋을 만큼 착취가 난무하던 해방 정국을 지나 ‘국민 위에 군림하는 공직’이라는 성격을 더욱 강화한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자신과 자신에게 충성하는 고위 공직자들의 부정부패에 관대했던 박정희 정권을 지나면서 관의 ‘갑질’은 알차게 발전한다. 관으로 들어가는 길인 각종 ‘고시’가 입신출세의 대명사가 되어 열풍을 일으키는 풍경은 이런 역사적 배경 아래 너무도 합리적인 결과다. ‘전관예우’라는 시스템은 이런 세상의 이치가 절대로 바뀌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아두는 구실을 해왔다. 이렇게 꽉 짜인 틀 속에 접대와 뇌물의 관행이 놓인다.
이런 상황에서 을의 반란은 늘 ‘심정적 폭발’이었다. 폭발을 이끄는 것은 대개 김주열·박종철·이한열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개인의 죽음’이었다. 심정의 폭발 없이 차분히 토론하고 변화를 이끌어낸 경험이 한국 사회에는 드물다. 독특한 한국의 시위 문화는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각개약진 이데올로기에 깔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던 ‘을’의 반란이다.
‘증오의 종언’을 향해 가는 길그러니 지금 “어떻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영업사원이 아버지뻘 대리점주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 “여승무원을 폭행한 대기업 임원이 제정신이냐”는 분개는 또 한 번의 ‘심정적 폭’일 수 있다. 지은이는 “갑을관계에 대한 고발에서 출발하면 다수가 동의하는 일도 ‘경제민주화’ ‘대기업의 우월적 지위 남용 규제’ 등의 포괄적 개념을 먼저 들고나가면 반대자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난다”고 지적하며 ‘증오의 종언’을 향해 가려면 갑을관계 타파를 정의나 도덕이 아닌 성장과 혁신의 차원에서 생각할 것을 권한다.
임지선 기자 한겨레 문화부 sun21@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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