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에 대한, 사뭇 고상하거나 심오해 뵈는 단상으로 이 글을 열 수는 없었다. 매일같이 책을 읽어야 하는 ‘책 기자’의 처지에서, 책을 읽는다는 건 한마디로 ‘노가다’라고 생각하는 편이니까. 실제 막노동을 하는 분들이라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 하겠지만, 신문사에서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일로 생업을 삼는 책 담당 기자의 육체가 말하는 비교적 솔직한 심정이니 양해해주실 거라 믿는다.
책 기자의 책상엔 대개 가위가 놓여 있다. 나를 비롯한 책 기자의 하루는 어김없이 이 가위를 들고 매일같이 출판사에서 보내오는 신간 포장 봉투를 뜯는 일로 시작된다. 가위 없이 맨손으로 책봉투를 뜯겠다고 덤비다간 싯누렇게 날선 종이에 손가락을 베이기 십상이다. 그래도, 누군가의 말마따나 ‘책 기자는 신문사에서 가장 행복한 보직’이라는 걸 굳이 부인하고 싶진 않다. 책을 돈 주고 사기는커녕 공짜로 읽을 수 있고 그 일로 월급까지 받으며 책의 숲을 쏘다니고 사유하고, 생각의 울타리를 넓히고 때론 그 울타리마저 뜯어내는 여행을 일삼을 수 있으니까. 학술서이건, 인문교양서이건, 대중의 트렌드를 좇는 실용서이건, 책은 동시대인의 얼굴과 그 시대의 욕망과 고민을 드러내 보인다.
누군가는 문학을 하는 사람은, 영혼 깊숙이 들어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했다. 그 문장을 조금 바꾸어 말한다면, 책을 읽는 사람은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통박한 ‘타자들에 대한 환대’의 의미를 가슴에 되새길 줄 알며, 이 사회 약자와 소수자들의 눈물과 고통을 외면하지 못한다. 또한 우리는 책을 읽으며 민주주의란 완성태가 아니라 언제나 처절한 투쟁을 통해 비로소 조금씩 획득해낸, 그러나 그렇게 따낸 권리가 언제든 퇴행할 수도 있는 것임을 역사의 경험 속에서 배우며, 타인의 고통에 감정을 이입하는 공감이 인간의 제1의 능력이며 공감할 줄 모르는 것이야말로 무능력임을 배운다.
매주 닥치는 마감 데드라인 앞에서 실핏줄 터져가며 책 리뷰 기사를 쓰는 일을 나는 ‘대결’이라 부른다. 한 권의 책과의 대결,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이 오랜 세월 집적한 지적 세계와의 대결, 책 바깥 상식이라는 이름의 편견과의 대결, 그 책을 가장 잘 드러내기 위해, 그 책의 고갱이를 최대한 잘 전하기 위해, 내 육체가 벌이는 씨름이다. 책씨름이다.
책 읽기를 노동 삼는 지금도, 이따금 어릴 적 일이 떠오른다. 한라산 밑둥치에 펑퍼짐하게 펼쳐진 산간지대에 자리한 조그만 시골 분교. 그 학교의 폐가식 도서관과 여름의 시원하던 나무 그늘, 겨울엔 곱은 손을 녹여주던 나무로 때던 난로. (레 미제라블) 같은 문고판 도서를 읽던 날 내 마음속에 차오르던 기쁨. 내게 책 읽기는 언니가 사다둔 창비 영인본에서 뜻 모를 한자 제목으로 된 소설을 읽던 초등학생의 어느 날의 호기심, 온 식구가 저녁을 먹자 부르는데 홀로 나타나지 않던, 다들 저녁을 먹고 있는데 휘장이 내려진 벽장 안에서 터져나오던 돌연한 오빠의 울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다. 휘장을 걷은 어머니가 놀라서 이유를 물은즉슨, 두 손에 들고 읽던 책에 코를 박은 오빠 왈, “책이 너무 슬퍼서”였던바, 그날 오빠는 어머니한테 등짝을 한 대 맞고 밥을 먹어야 했지만, 어린 내게 책 읽기는 맛난 저녁밥을 안 먹고 참을 수 있을 만큼, 이곳에서 저곳으로 그 누군가 모르는 이들의 슬픔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사치스러운 통로였다.
조지 오웰은 라는 책에서 글을 쓰는 첫 번째 이유로 ‘이기심’을 꼽았다. 몇 년 전 내가 썼던 리뷰를 인용한다면, ‘똑똑해 보이고 싶고, 사람들의 얘깃거리가 되고 싶고,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그런 따위의 욕구’다. 지적 허영이거나 남들에 대한 인정투쟁이란 얘긴데, 100% 수긍되는 얘기다. ‘비판적 개인’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살았던 오웰이 말하는 마지막 네 번째 이유(둘째, 셋째 이유는 책을 직접 보시길)는 ‘정치적 목적’. 곧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고 분투해야 하는 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다. 책을 읽는 이유도 매한가지 아닐까 싶다.
흔히들 가을을 독서의 계절로 여기지만, 책 좀 읽은 사람은 안다. 날 더워 쏘다니기 불편한 여름이야말로 ‘독서의 계절’이라는 걸. 책 읽기 딱 좋은 이 계절에 지난 1년 어름에 출간된 책 가운데 딱 11권의 양서를 골라 소개한다.
허미경 기자 한겨레 책지성팀장 carme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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