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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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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식 물 이 우 리 에 게 하 는 말
등록 2013-07-10 15:54 수정 2020-05-03 04:27

열어놓은 책상 옆,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뭉텅이로 들어온다. 그 바람 이 내 피부의 알 수 없는 감각을 깨워놓은 건지, 순간 말로 설명하기 힘 든 평온함이 번진다. 아, 바람이 내게 무엇인가를 한 게 틀림없다!
가끔 우리는 우리만이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생각한다고 착각 하지만 그건 분명 아니다. 바람이 내 피부를 스치며 내게 무엇인가 를 말했을지도, 사계절 집 앞에 서 있는 밤나무가 흔들리는 가지와 잎으로 어쩌면 내게 이걸 좀 알아야 한다고 손짓하고 있었는지도 모 른다. 세상은 우리가 보고 듣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데 눈과 귀에 갇 혀서 더 이상 우리는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식물도 분명 보고, 느끼고, 생각한다. 큰 나무 옆에서 자라야 하는 어린 나무는 햇볕을 받아들이기 위해 똑바로 자라지 않고 가지를 구 부리고 꺾는다. 상추는 자신에게 달라붙는 진드기를 떼어내기 위해 진드기가 싫어하는 독을 만들고, 겨울이 매서운 북반구에 사는 전 나무는 바람의 속도를 파악해 가지가 얼마나 두툼해야 쓰러지지 않 고 자랄 수 있는지를 계산한다. 매화나무는 언제 꽃을 피워야 열매 를 맺을 수 있는지 알고, 사막에 사는 식물은 뜨거운 햇빛을 견디려 면 잎이 얼마나 가죽처럼 두꺼워져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이 런 식물이 우리보다, 동물보다 미개하다 말할 수는 없다. 식물은 움 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적응하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킨다. 날씨가 변하면 날씨에 맞게, 병충해가 찾아오면 그 병충해를 이기기 위해, 그늘이 지면 그늘진 상황을 이겨내기 위 해 식물은 동물처럼 자신에게 맞는 환경을 찾아 떠다니는 것이 아니 라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끝내 그 자리에서 적응한다.
요즘 풀어야 할 문제가 풀리지 않아 머릿속이 계속 웅성거린다. 맘이 이러니 늘 찾아오던 장마도, 무더위도, 징그럽게 뚜렷한 사계절도 다 힘겹고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밤나무 잎을 스치고 온 바 람이 내 얼굴과 팔뚝을 스칠 때 문득 늘 거기 그 자리에 서서 책상에 앉아 있던 나를 봐왔을 밤나무가 보였다. 왜 저 밤나무는 움직이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궁금해진다. 환경을 바꾸는 것보다 자신을 바꾸는 삶을 선택한 셈이다. 능동이 아니라 수동의 삶일 수도 있다.
세상이 왜 나한테만 이렇게 불공평한 것인지, 왜 나에게 이렇게 억 울한 일이 생긴 건지

한겨레 김정효

한겨레 김정효

, 난 성실했건만 결과는 왜 이러한지… 세상이 날 못살게 구는 일투성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세상이 날 위해 변 해주지도, 날 위해 공평하지도 않다는 걸 진즉에 알지 않았던가. 우 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불공평한 세상에 나를 맞추고 변화시켜 평 화를 만들어낼 뿐이라는 것도. 이렇게 살아남았으니 정말 고마운 일 이다. 식물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밀려오는 변화를 수동적으로 받아 들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잘 살아남은 식물은 흙을 바꾸고, 그늘을 만들고, 바람을 막고, 결국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킨다.

식물이, 바람이, 구름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데 초능력을 잃은 우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들썩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만 히 자연이, 식물이 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너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오경아 작가·가든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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