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방에서 태어나고 방에서 죽는다. 방은 자 궁이고 무덤이다. 방에서 우리는 사랑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잔다. 지상에 방 한 칸 없는 사람이 불행한 것은 그 래서다.
내밀성을 간직한 사적인 방
프랑스의 역사학자 미셸 페로의 (글항아 리 펴냄)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간의 거처로서 방(침실) 이 변모해온 역사에 다채로운 이야기와 이미지를 버무린 책이다. 이 책이 안내하는 방은 사적 공간으로서의 방이 다. 개인의 방이나 부부 침실은 단순히 여러 개의 방 가 운데 하나가 아니라 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이고 독자적 인 단위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 점에서 방의 첫 번째 원칙은 격리다. 격리의 원칙이 보편적으로 정착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가난한 농민들은 20세기까지도 하나의 공간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바로 그곳에서 함께 잠을 잤다. 도시 노동계층 역시 하나의 공간을 일과 거주 의 다용도 공간으로 활용했다.
중세의 성에서 르네상스기의 궁전까지 귀족이나 왕이 건축한 거대한 공간에서도 독자적인 공간은 허용되지 않 았다. 다른 방을 통과하지 않고 각자의 방으로 갈 수 있 는 공간, 이른바 복도가 탄생한 것은 17세기 영국의 대저 택에서다. 복도의 탄생이 내밀성의 욕구라는 새로운 감 수성의 출현으로 해석되고 이 감수성이 사회적 사다리 를 타고 확산됐다. 각자의 방에서 개인주의가 탄생했다.
저자가 소개하는 방들 가운데 제일 먼저 등장한 것은 왕의 침실. ‘왕의 침실은 신성하다.’ 왕권신수설에서 유래 한 이 원칙은 베르사유의 루이 14세 침실에서 극대화됐 다. 왕의 침실은 볼거리가 행해지는 곳이자 무대이고 권 력의 핵심이자 도구였다. 궁정 전체가 한눈에 보이는 곳 에 자리잡은 침실에서 왕은 시선과 말의 이중 방식으로 궁정을 지배했다. 이렇게 해서 왕의 사적 영역은 공적 영 역인 궁정 전체를 삼켜버렸다.
왕의 침실에 이어 저자는 방이 개인용 잠자리인 침실 로 전이되는 점진적 과정을 관찰한다. 특히 부부 침실 은 방의 역사에서 결정적 분기점을 이룬다. 침실은 잠을 자기 위한 공간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다양 한 경험의 영역이자 창조의 공간이었다. 부부생활 외에 도 고독과 다양한 사색의 관행, 독서와 글쓰기 공간으로 활용된 것이다. 모두가 함께 생활하던 공동의 방에서 부 부의 공간을 거쳐 이 책의 긴 여정이 도달할 지점은 바로 그러한 공간이다. 그것은 혼자만의 방이다. 다시 말해 작 고 밀폐됐으며 내밀성을 간직한 사적인 방이다.
자기만의 방 갖기는 경제적 여유와 가정생활의 변화, 예절과 사적 영역 발달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다양하고 꾸준하게 이루어졌다.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여성은 일 하고 공상하고 글을 쓰고 기도하고 사랑받기 위해 남성 보다 훨씬 더 자신만을 위한 사적인 공간을 원했다. 침실 창문에 앉아 있는 여자 몽상가나 거의 벌거벗은 채로 카 나페, 소파, 침대 위에 길게 누워 있는 여자 독서가들에 관한 에로틱한 상상 역시 그런 갈망을 부추겼다. 침실은 여성의 공간이었고 여성은 그곳의 지배자였다.
인생의 모든 길이 방으로 향한다저자가 첫 부분에서 고백했듯이 이 책에서 제시한 방 은 서구 문화의 산실에 국한돼 있지만, 왕의 침실에서 스 쳐 지나가는 방까지 온갖 종류의 방의 모습을 통해 내밀 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여러 유형을 일별할 수 있다. 잠, 휴식, 출생, 욕망, 사랑, 사색, 독서, 글쓰기, 자아추구, 신, 은둔, 병치레 등 인생의 모든 길이 방으로 향한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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