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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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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이 흘렀다고 범인은 참회했을까

공소시효가 낳은 또 하나의 범죄를 논리적 반전으로 엮은 영화 <몽타주>
등록 2013-05-24 20:28 수정 2020-05-03 04:27

영화 는 팽팽한 긴장과 반전이 살아 있는 스릴러다. 의 엄정화와 의 김상경이 아이를 잃은 엄마와 범인을 놓친 형사로 만나 호연을 펼치는 가운데, 영화는 반전을 통해 법과 도덕의 문제를 반문한다.

서진 엄마는 15년 전 아이를 잃고 사건은 공소시효를 맞는다. 완성도 높은 수사물 에서 엄정화는 에서처럼 아이를 잃은 엄마를 연기한다. 호호호비치 제공

서진 엄마는 15년 전 아이를 잃고 사건은 공소시효를 맞는다. 완성도 높은 수사물 에서 엄정화는 에서처럼 아이를 잃은 엄마를 연기한다. 호호호비치 제공

시간적 착시를 이용한 ‘반전’

오 형사(김상경)가 15년 전 아이를 잃은 서진 엄마(엄정화)를 찾아가 곧 공소시효가 만료됨을 알린다. 서진 엄마의 오열을 뒤로하고 마지막으로 현장을 찾은 오 형사는 범인이 그곳에 다녀갔음을 알아챈다. 의 마지막 장면은 15년 만에 현장을 찾은 형사가 누군가 다녀갔다는 소녀의 말에 부릅뜬 눈으로 화면을 응시하는 것으로 끝난다. 는 여기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간다. 오 형사는 현장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등을 뒤져 의심되는 차량을 찾아내지만, 또다시 범인을 놓친다. 서진 엄마는 현장에 떨어진 우산을 단서로 사건에 매달리지만, 공소시효는 만료된다. 그런데 얼마 뒤 할아버지와 놀던 한 아이가 유괴되고, 범인은 15년 전 사건과 똑같은 방식으로 돈을 요구하는데….

는 수사물로서 완성도가 뛰어나다. 오 형사가 차량을 추적하는 과정이나, 경찰이 쫙 깔린 용산역에서 범인이 돈가방을 탈취하는 과정, 형사들의 수사가 반전으로 뒤집히는 과정 등은 스릴러적 쾌감으로 가득하다. 의 반전은 느닷없는 깜짝쇼나 ‘반전을 위한 반전’이 아니다. “통화감이 다르다”는 최 형사의 말이나 할아버지가 화면에서 사라진 것 등은 반전을 암시한다. 영화의 반전은 에서 보았던 것처럼 시간적 착시를 이용한 것이다. 는 15년 전 사건과 현재 사건을 촘촘한 교차편집으로 엮으면서 현재 사건의 시간차를 끼워넣어 착시효과를 높인다. 영화는 시간차가 존재한다는 힌트도 도중에 노출한다. 이처럼 가 충분히 힌트를 공개하는 이유는 반전을 속임수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반전을 통해 법적·도덕적 문제의식을 관객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영화는 첫 시퀀스에 핵심을 다 담고 있다. 사건 자료를 모두 모아둔 채, 15년을 하루같이 살고 있는 서진 엄마는 ‘그놈 목소리’가 거실에 울릴 때,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지고 경련이 일 듯한 표정을 가까스로 억누른다. “시간의 경과로 증거보존이 어렵고 기억의 왜곡으로 증거능력이 떨어지며, 오랜 기간 동안 범인도 고통받았기 때문에 참회와 처벌의 시간이 주어진 것으로 본다”는 공소시효의 근거를 듣던 서진 엄마는 “범인이 참회했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피해자는 사건을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기 때문에, 공소시효는 수사 당국의 입장에서 수사를 그만하겠다는 관료주의적 면피에 불과하다는 항변이다. 영화는 공소시효가 끝나자 반복되는 사건을 통해 공소시효가 재범과 모방범죄를 낳을 수 있음을 경고한다. 또한 공소시효로 인해 범인을 처벌할 수 없는 피해자들은 어찌해야 하는지 되묻는다.

는 공소시효가 끝나자 스타처럼 나타난 범죄자를 통해 공소시효의 역기능과 피해자들의 자구책을 보여주었다. 의 피해자들이 언론플레이를 통해 범인을 끄집어낸 것과 달리, 의 피해자는 역지사지의 방법으로 범인을 응징한다. 영화가 반전을 통해 보여주는 응징은 윤리적 논란은 있겠지만, 서사의 정합성을 지닌다. 가령 의 복수는 대상과 방법이 어긋난 역지사지에 반전도 억지스러웠지만, 의 응보는 대상과 방법이 최대한 일치하며 반전도 논리적이다.

사이코패스 아닌 범인, 무고하지 않은 피해자

영화는 범인을 사이코패스로 그리거나 피해자를 무고한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선악의 판단으로 움직이는 도덕적 주체다. 범인이 ‘죽어가는 자식 앞의 부모 심정’을 운운할 때나, 피해자가 “재판 끝날 때까지만 눈감아달라”며 매달리는 대목은 도덕적 아이러니를 전한다. 범인은 고통 속에서 자기 행동을 복기하면서도, 15년 전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다. “참회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자축한 것”이라는 오 형사의 말은 참회와 용서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유보시킨다. ‘내 자식을 살리기 위해, 남의 자식을 유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범인과 피해자를 거쳐 관객에게 던져진다. 이제 범인은 남의 자식을 유괴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딸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자신이 돈 때문에 딸에게 지옥의 고통을 안긴 파렴치한 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너를 살리기 위해 다른 이에게 네가 맛본 그 고통을 안겼다’는 진실을 털어놔야 한다. 그는 그것을 말할 수 있을까. 딸은 그런 부모를 용서할 수 있을까. 당신의 부모가 ‘너를 살리기 위해, 네가 맛본 지옥의 고통을 남에게 안겼었다’고 고백한다면 부모의 지극한 사랑에 감복할 것인가, 아니면 끔찍한 이기심에 치를 떨 것인가. 내 자식만 살리면 된다는 부모의 이기심이 ‘교육지옥’을 낳은 대한민국에서, 의 교훈과 함께 곱씹어볼 일이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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