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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모여 울 나라가 없다

다큐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 이어 극영화 <가족의 나라> 만든 양영희 감독 인터뷰… “우리는 어느 국가가 아니고 역사가 바뀌는 그때를 고대하며 살아왔지요”
등록 2013-03-02 13:33 수정 2020-05-03 04:27

이상하다 이 가족, 28년 만에 만났지만 서로의 손을 잡고 눈물을 삼킬 뿐 말을 하지 않는다. 체제에 대해 말할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 돌아온 아들(이우라 아라타)과 얼어붙은 역사 사이에 갇힌 일본의 부모는 거듭거듭 눈물과 마음을 다스린다. 재일 조선인 양영희 감독이 만든 새 영화 에 나오는 가족들이다. 양 감독은 “일본에 살지만 사실상 북한 체제 안에서 그것도 전시와도 같은 압박을 느끼며 살아온 가족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울고 싶지만, 소리치고 싶지만 참는 이유는 하나다. 가족의 나라는, 가족이 한데 모여 울 만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영화 ‘가족의 나라‘의 양영희 감독은 얼어붙은 역사에 갇힌 가족에게 “한데 살며 행복할 수 있는 곳은 없다”고 말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영화 ‘가족의 나라‘의 양영희 감독은 얼어붙은 역사에 갇힌 가족에게 “한데 살며 행복할 수 있는 곳은 없다”고 말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셋째오빠가 잠시 돌아왔을 때 이야기를 극영화로

1971년 가을, 두 오빠는 북한으로 건너갔다. 고등학교 1학년 건아 오빠와 중학교 3학년 건민 오빠는 머잖아 통일될 조국의 미래를 꿈꾸며 귀국선에 올랐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간부의 두 아들을 실은 배가 멀어져도 어머니는 바다만 쳐다보며 하염없이 서 있었다. 다음해 4월, 김일성 주석 탄생 60돌을 맞아 총련계 조선대학교 1학년이던 장남 건오 오빠도 사회주의 건설의 선봉대로 수령님께 보내졌다. 그로부터 40년, 이 가족은 다시는 한 지붕 안에서 잠들지 못했다.

양영희 감독은 1995년부터 2008년까지 13년 동안 평양과 오사카를 오가며 찍은 기록으로 (20067)과 (2011)을 내놨다. 이번이 세 번째 영화지만, 극영화로는 처음이다. 는 1999년 셋째 오빠 건민이 병에 걸려 일본으로 잠시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를 영화로 새롭게 만들어낸 것이다. 이 나온 이후 양영희 감독은 북한에서 입국 금지 대상자에 올랐다. 몇 해 전 건오 오빠와 아버지는 각각 평양과 오사카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9만4천 명이 일본에서 북한으로 ‘귀국’했지만 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 대부분의 삶은 우리 예상과 비슷했다. 음악과 영화를 사랑하던 우아하고 섬세한 건오 오빠는 그 취향 때문에 혹독한 ‘자기비판’에 직면했고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신을 놓아버렸다. 건축가가 되려고 북으로 간 둘째 건아 오빠는 평양 도시계획연구소에서 일하지만 주로 하는 일은 정치학습이란다. 김일성종합대학 이학부를 나온 건민 오빠는 무역 관련 일을 하지만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건민 오빠의 뺨에서 종양이 발견됐다. 셋째오빠의 귀국은 몇 년 동안이나 가족들이 돈과 힘을 써서 이루어졌지만, 결국 치료도 받지 못했다. 돌아온 지 2주도 되지 않아 북한의 ‘일제 귀국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오빠는 원망도 한탄도 잊어버렸다. 다만 이렇게 당부할 뿐이다. “너는 자유롭게 살아라. 네가 있는 모습 그대로.”

공인되지 않은 이 역사에 대한 일본의 놀람은 컸다. 양영희 감독은 요미우리문학상,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일본시나리오작가협회에서 각본상을 받았고 일본 영화전문지 는 이 영화를 ‘2012년 일본 영화 1위’로 뽑았다. 양 감독의 분신이라 할 여동생 리에 역의 안도 사쿠라도 이 영화로 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영화를 보신 어머니의 감상 한마디 전해드릴까요. ‘네 젊을 때를 쏙 닮았다. 어디서 그런 배우를 찾아왔노. 북한에서 편지나 전화가 올 때마다, 아빠하고 밥 먹을 때마다 너는 항상 화를 냈다’ 그러시더라고요.” 안도 사쿠라가 연기하는 것은 카메라를 들기 전의 감독이다. 그전에는 ‘북한이 그렇게 좋으면 아빠나 가지, 자기는 여기서 일본 자본주의를 즐기면서 아들들만 보냈느냐. 미친 아버지’ 하고 막 화를 냈단다. 그러나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하나 남은 딸이기도 했지만 워낙 “아들한테는 엄격한 뱀파이어처럼, 딸한테는 자상한 칠복신처럼” 대하는 아버지였다.

“따라다니지 말라”지만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사는 것”

앞의 두 다큐멘터리에서 북한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자제하던 양영희 감독은 영화 , 그리고 이와 함께 발간되는 자전 에세이 (씨네21북스 펴냄)에서는 더 이상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에세이에서 양영희 감독은 여러 번 “곰팡내와 땀냄새가 섞인 평양의 냄새”를 말한 일이 있었다. 그에게 ‘서울의 냄새’는 무엇일까? “평양과 닮았죠. 일본과는 확실히 달라요. 산이 달라서 그런가요. 처음 서울에 온 것이 2004년쯤인데 고향 같기도 하고 외국 같기도 한 땅을 걸으며 나는 일본 사람에 너무 가깝다고 느꼈어요. 분단에 대한 이야기를 늘상 듣고 자랐으면서도 몸은 평양에 이어진 반도의 한 곳을 걷고 있는데 갈 수는 없다는, 그 실감이 충격적이죠.”

“따라다니지 마. 더 이상 따라다니지 말라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오빠가 아니라 나한테 해!” 영화에서 여동생은 있는 힘껏 오빠에게 붙은 감시원(양익준)에게 소리친다. 그러자 감시원은 이렇게 답한다. “동생분이 싫어하는 그 나라에서 오빠도 저도 같이 살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 사는 겁니다.” 이 말은 감독이 수십 년간 마음속에서 외쳐온 말이란다. 항상 양어깨에 북한과 일본을 짊어지고 다니는 여동생은 아마 처음에는 “따라다니지 말라”고 소리쳤을 테고 지금은 “죽을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을 것이다.

“가족의 나라가 어디 있어요? 없어요. 영화에서는 주인공 리에가 슈트케이스를 끌고 찾으러 나서지만 어디를 간들 오빠들은 없고 우리가 한데 살며 행복할 수 있는 곳은 없어요. 우리는 어느 국가가 아니고 역사가 바뀌는 그때를 고대하며 살아왔지요.” 양영희 감독의 말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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